나의뿌리/신라 박씨

신라박씨 역대왕

梅谷 2010. 4. 3. 09:41

 
신라 박씨역대왕기
신라 제2대 남해왕기(南解王紀)
신라 제2대 남해왕은 시종왕의 맏아들이시니 처음에 차차웅이라 하셨다. 재위 20년, 수(壽)는 74세시다. 능은 시조왕릉과 같은 곳 묘좌이다. 원년 갑자(甲子)에 왕비 김씨를 봉하여 운제왕후를 삼으시고 다음 왕비 석씨는 아루왕후라 하다.

3년 병인 (丙寅)정월에 시조왕의 사당을 세우고 사시로 친히 제사하실새 왕의 누이 동생 아로(阿老)로 제사를 주장하게 하다.

5년 무진(戊辰)에 왕께서 석탈해(昔脫解)의 어질다는 말을 듣고 맏딸로 그의 아내를 삼게하시다.

21년 을유(乙酉) 9월에 왕께서 훙서 하시니 태자 유리(儒理)가 왕위에 오르다. 왕의 임종에 태자 유리와 탈해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은 후에 박씨와 석씨 두 성씨 중에 나이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르라 하시고 돌아가셨는데 유리가 탈해는 덕망이 있다하여 왕위를 사양하니 탈해가 말하기를 신기대보(神器大寶 : 왕위를 말함)는 용렬한 사람의 감당할 바 아니다. 내가 듣기로는 어진 사람은 이빨이 많다 하고 떡을 물어서 시험한즉 유리의 이빨이 더 많은 지라 드디어 왕위에 올라 남해왕을 선릉(先陵)의 영역(榮域)안에 장사하다.
신라 제3대 유리왕기(儒理王紀)
신라 제3대 유리왕은 남해왕의 태자이시니 처음으로 유리 이사금(유리이사금)이라 일컫다.왕위에 계신지 33년이오 수(壽)는 미상, 능은 선능(先陵) 국내 묘좌(卯坐)며 왕비는 명선왕후 김씨(明宣王后 金氏)요 능은 동산 자좌이다. 유리 원년 을유(乙酉)에 김씨를 봉하여 명선왕후라 하고 처음으로 쟁기(쟁기:밭이나 논을 가는 기구)와 수레를 만들고 친히 시조왕 사당에 제사 지내고 죄인을 석방하다.

4년 무자(戊子) 10월에 왕이 나라안을 순시 하실 때 늙은 할머니가 헐벗고 굶주려서 죽을 지경인 것을 보고 말하시기를 내가 미력한 사람으로 왕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잘 기르지 못하여 늙은이와 어린이가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나의 죄(罪)라 하고 곧 옷과 양식을 주게하고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홀아비와 홀어미와 고아(孤兒)와 노병자(怒病者)로서 자활(自活)할 수 없는 백성을 위문하여 의복과 식량을 주어서 기르게 하니 이웃나라 백성들이 왕의 어진 정치를 듣고 귀화(歸化)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해에 처음으로 도솔가(도率歌)를 지어 노래하니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조이다. 얼음 저장하는 빙고(氷庫)를 축조 하다

주나라에 문왕과 한나라에 문제(文帝)가 늙은이를 기르는 것을 첫 정사로 삼고 홀아비와 홀어미와 고아를 먼저 돌보았으니 왕의 어진 정치가 주문왕(周文王)과 한문제(漢文帝)에게 비길만하다.

8년 임진(壬辰)봄에 왕께서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주시니 이씨(李氏) 최씨(崔氏) 손씨(孫氏) 정씨(鄭氏) 배씨(裵氏) 설씨(薛氏) 육성이다. 육부를 반으로 나누어 둘로 만들어 왕녀 두 사람으로 각각 그 부내의 여자를 인솔(引率)하여 7월 기망(旣望16일)부터 매일 육부의 뜰에 일직 모여서 밤이 늦도록 삼을 삼게하여 8월 보름날에 이르러 성적(成績)을 심사(審査)하여 진 편은 음식을 마련하고 이긴 편에 치하하게 하여 서로 노래하고 즐겨서 온갖 놀이를 하였는데 이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 진편에 한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탄식하기를 회소 회소(會蘇會蘇)하였는데 그 음절이 슬프고 아담하여 뒷사람이 그 소리에 맞춰 노래를 지은 것이 會蘇曲이다. 벼슬은 17등급을 두었는데 첫째는 이벌찬(伊伐찬)이요. 둘째는 이척찬(伊尺?)이요 . 셋째는 잡찬(??)이요 . 넷째는 파찬(波珍?)이요 .다섯째는 대아찬(大阿?)이요 .여섯째는 아찬(阿?)이요 .일곱째는 일길찬(一吉?)이요. 여덟째는 사찬(沙?)이요.아홉째는 급벌찬(級伐?)이요 열째는 대내마찬(大奈麻?)이요 . 열한번째는 내마(奈麻)요 .열두째는 대사(大舍)요 .열셋째는 사지(舍知)요 .열넷째는 길사(吉士)요 .열다섯째는 대오(大烏)요 열여섯째는 소오(小烏)요. 열일곱째는 조사(造士)다.

19년 임인(壬寅)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滅)하다. 이해에 수로(首露)가 가락(駕洛)에 건국하니 영토(領土)가 동으로 월당(月堂)까지 남은 대마도(對馬島)까지요. 서는 가야(伽倻)까지 이르다. 신라 법흥왕(法興王)임자에 나라를 받들어 신라에 항복하다.

34년 정사(丁巳)10월에 왕께서 훙서(薨逝)하시다. 이에 왕께서 병드시어 신하에게 말씀하시기를 “탈해(脫解)는 나라의 척의(戚誼)있는 사람이요 보신(輔臣)으로서 여러 번 공로를 세웠다. 나의 두 아들은 그에게 따르지 못하고 또 선왕으로 명령에 아들과 사위를 가릴 것 없이 나이가 많고 어진 사람으로 왕위를 이르게 하라 하셨으므로 내가 먼저 임금이 되었으나 이번에는 마땅히 왕위를 전하여 선왕의 유훈(遺訓)을 잊지 말 것이다.” 하셨으므로 탈해가 왕위에 올라 비(妃) 박씨를 아효왕후(阿孝王后)로 봉하고 유리왕을 선릉 영역내의 묘좌에 장사하다.

신라 제5대 파사왕기(婆娑王紀)
신라 제5대 파사왕은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니 처음에는 파사이사금이라 하다.왕위에 계신지 32년이요 수(壽)는 미상, 능은 선능 영역안 묘좌니 이때 와서 오릉이라 하였다. 비(妃)는 사성왕후(史省王后) 김씨요 계비는 석씨니 능은 동산 자좌에 있다.사보(史譜)에 기록되고 태자 지마가 왕위를 이으시다.

원년 신사(辛巳)에 비 김씨를 봉해 사성왕후로 삼고 계비(繼妃)는 석씨다. 왕께서 비용(費用)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왕위에 오르시자 주군(州郡)을 순시(巡視)하여 창고에 곡식을 내어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죄수(罪囚)를 불쌍히 여겨 두 가지 죄를 지은 자가 아니면 모두 놓아주었다.

3년 임오(壬午)에 명령을 내리시기를 “지금 창고가 텅 비었고 무기가 무디어서 쓰지 못하게 되었는데 만약에 수한재(水旱災)나 변방에 대적이 침입한다면 어떻게 방비(防備)하겠느냐. 마땅히 유사로 하여금 농상을 장려하고 군사(軍士)와 무기를 단련하여 불시의 근심을 막게하라.” 하셨다. 친이 시조묘(始祖廟)에 제사하시다.

5년 갑신(甲申)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이 때에 정치(政治)가 간소하고 교화(敎化)널리 이루어져서 여러 가지 상서(祥瑞)가 나타나서 고타현(古陀縣)에서 푸른 소(靑牛)를 헌남하였고 남신현(南新縣)에 보리이삭이 둘씩 달려서 배곡(培穀)이 풍성하여 길가는 사람이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더라.

8년 정해(丁亥) 7월에 명령을 내리기를 우리나라가 서쪽에는 백제(百濟)와 이웃하고 남쪽은 가야와 접했으나 덕으로 이웃나라를 회유하지 못하고 위력(威力)으로 두텁게 하지 못하니 마당히 성벽(城壁)이나 잘 수축(修築)하라 하시고 가소성(加召城;居昌) 마두(馬頭).청도(淸道)의 두 성을 축조(築造)하다.

11년 기축(己丑)에 사신 10인을 각주군에 파견(派遣)하여 직책을 게을리 하여 전야(田野)를 황폐하게 한자를 적발(摘發)하여 벼슬을 삭탈하게하다.

. 14년 계사(癸巳)에 왕께서 고소부리군(古所夫里郡)에 행차 하시와 나이 가장 높은 노인들을 위문(慰問)하시고 양곡을 하사 하시다..

15년 갑오(甲午) 2월에 가야병(伽倻兵) 마두성(馬頭城)을 포위 하므로 아손길원(阿飡吉元)을 보내어 기병(騎兵)으로 공격하여 물리치고 8월에 알천에서 군사를 열병하다..

17년 병신(丙申)에 가야가 남쪽 국경을 침범하니 성주 장세(城主 長世)가 항거하여 싸우다가 죽으니 왕이 크게 노하사 친히 용사 5천을 이끌고 싸워서 무찌르고 많은 적을 포로(捕虜)하니 가야왕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사과 하므로 진격을 중지하다. 수로왕 동생 5인이 5가야왕이 되었는데 곧 지금의 함안(咸安)고령(高靈) 성주(星州) 함창(咸昌)이다..

22년 신축(辛丑)에 금성이 동남에 새로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이름하여 왕께서 이사(移徙)하시다. 실직(悉直)과 압독(押督) 두 나라가 항복 하였고 음집벌국(音집伐局)이 실질곡국 삼척(悉直谷國 :三陟)과 국경(國境)을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결정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수로가 나이 많고 지혜가 있다하여 불러서 물으시니 수로가 즉석에서 결정하여 그 땅을 음직벌곡에게 귀속시키다..

23년 임인(壬寅)에 음집벌국이 와서 항복하다.

25년 갑진(甲辰)에 실직국(悉直國)이 배반하거늘 처서 평정(平定)하고 그 백성을 남쪽변방에 옮기다..

26년 을사(乙巳)에 백제(百濟)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和親)을 청하다.

29년 무신(戊申) 5월에 큰물이 나서 백성이 굶주림으로 사신을 10도에 보내 창고를 열고 곡식을 내어 백성을 구제하고 비지 창녕{比只:昌寧)과 다벌 대구(多伐: 大邱)와 초팔 초계(草八 草溪)등 세나라를 쳐서 합병하다.

30년 기유(己酉)에 황충(蝗蟲)이 곡식을 해치거늘 왕이 두루 산천에 기도(祈禱)하고 제사지내니 황충이 없어지고 풍년이 들었다.

33년 임자(壬子)10월에 왕이 훙(薨훙하시니 태자 지마(祗摩)가 왕위에 올라 파사왕을 선릉의 영역에 장사하니 이를 오릉이라 한다.
신라 제6대 지마왕기(祗摩王紀)
신라 제6대 지마왕은 파사왕의 적자(嫡者)시니 처음에는 지마이사금(祗摩이이師今)또는 지미(祗味)라고도 하였다]이라 하니 왕위에 계시기를 22년이요 수(壽) 미상, 능은 국도 남쪽 십리에 포석정 건지동 을좌이며 왕비는 김씨니 애례왕후(愛禮王后)시며 릉은 영산자좌(寧영山子坐)이다. 원년 갑자 오봉원년 4월 병진(丙辰)에 왕위에 오르시니 그때 나이 13세이다.거서간(居西干) 혹은 거슬감이라 하니 진한의 말에 귀인의 존칭이다. 국호(國號)는 서라벌이라 한다.

3년 갑인(甲寅)에 큰 물이 지므로 왕은 죄수들을 보살펴 사죄(死罪)를 제하고 모두 놓아주었다.

4년 을묘(乙卯)2월에 가야에 남변을 침범하니 추 칠월에 왕이 보병(步兵)과 기병을 이끌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너니 가야의 복병이 여러겹으로 포위 하거늘 왕이 힘을 다하여 쳐부수고 포위를 뚫고 물러갔으나 이로부터 두 나라는 다틈이 쉬지 않았다.

5년 정사(정사)에 장수를 보내 가야(伽倻)를 침노할새 친히 정병(精兵) 1만을 이끌고 뒤따라 가니 가야가 성을 굳게 지켜 항거 하거늘 마침 장마비를 만나서 회군하다.

10년 신유(辛酉)1월에 익종(翌宗)으로 이찬을 삼다. 이해에 왜병(倭兵)이 침노해오다.

11년에 큰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와서 나무를 꺽고 기와를 날리니 도성(도성)사람들이 유언비어(유언비어)를 퍼트려 왜병이 침입한다 하거늘 이찬익종 에게 명하여 효유(曉諭)하여 그치게 하다.

14년 을축(乙丑) 봄에 말갈(靺鞨)이 북경을 침입하여 아전과 백성을 죽이고 약탈(掠奪)하고 가을에 또 대령책(大關嶺)을 습격하여 이하 강릉(江陵)를 지내거늘 왕이 백제의 구원을 청하니 백제왕이 다섯 장수를 보내어 구원하여 말갈(靺鞨)을 물리치다. 말갈은 옛날 숙신씨에 끼친 종족(種族)으로 그 후손이 여진(女眞)김과 청(淸)이 되었다.

23년 갑술(甲戌) 왕이 훙(薨)하시니 아들이 없는지라 유리왕의 맏아들 일성(逸聖)이 왕위에 올라 지마왕을 국도 남쪽 십리 포석정 건지동의 을좌에 장사하다.

신라 제 7대 일성왕기(逸聖王紀)
신라 제 7대 일성왕은 유리왕의 장자니 처음에는 일성이사금이라 하였다. 왕위에 계신지 20년이며 수(壽)는 1백 11세요 능은 국도(國都) 남쪽 7리 해목령(蟹目嶺) 아래 장정동 묘좌이다. 비는 계비석씨(繼妃昔氏) 릉은 금서문 밖 자좌이다. 계비 허씨 정안왕후이며 태자는 阿達羅王이다.

원년 을해 석씨를 왕비로 봉하다.

3년 병자(丙子)에 웅선(雄宣)으로 이찬을 삼고 겸하여 내외병마사를 맡게하다.

4년 정축 봄에 말갈(靺鞨)이 침입하여 장령의 다섯 성책을 불태우거늘 곧 성책을 새로 세워서 침입을 방지하다.

5년 무인(戊寅)에 정사당(政事堂)을 금성에 세우고 북방을 순행(巡行)하여 태백산에 제사(祭祀)하다.

11년 갑신(甲申) 2월에 주군에 명령하여 제방을 수축하고 전야(田野)를 개척하며 또 백성들이 금은주옥 (金銀珠玉)을 쓰는 것을 금지하다.

12년 을유(乙酉)에 한재(旱災)로 흉년이 들어서 곡식을 옮겨서 기민(飢民)을 구제(救濟)하다.

13년 병술(丙戌)에 압독(押督)이 배반하거늘 쳐서 평정(平定)하고 그 무리를 남쪽 땅에 옮기다.

15년 戊子에 박아도(朴阿道)를 봉하여 갈문왕(葛文王)을 삼다.

21년 갑오(甲午])2월에 왕께서 훙(薨)하시고 태자 아달라(阿達羅)가 왕위에 오르니 신장(身場)이 칠척이요 풍체가 준수하고 모습이 의젓 하셨다. 일성왕을 국도(國都)남쪽 7리인 해목령 아래 장정동 묘좌에 장사하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기(阿達羅王紀)
신라 제8대 아달라 왕은 일성왕의 태자시니 처음에는 아달라 아사금이라 하였다. 왕위에 계신지 30년이요 능은 국도 남쪽 15리 배일산 묘좌다. 비는 계비석씨(繼妃昔氏) 능은 금서문밖 자좌이다. 원년 을미에 친히 시조묘에 제사지내시다. 10월에 아찬길선이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가니 계원(繼元)으로 이찬을 삼고 군사와 정무(政務)를 맡게하다.

3년 병신(丙申) 계림령(鷄立嶺)의 도로(道路)를 개통하다.

4년 정유(丁酉)에 왕께서 친히 장령진(長嶺鎭 : 강릉부근)에 순행하여 수비(守備)하는 군사를 위로하고 전투복을 하사하다. 이해에 영일현(迎日縣)을 설치하다. 처음엔 동해가에 영오랑(迎烏郞)과 세오녀(細烏女)의 부부가 함께 살았는데 이때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이 없으므로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모두 동쪽섬에 가 버렸습니다. 하니 왕이 사자를 보내 해빛을 되돌려주기를 청하니 영오(迎烏)가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돌아갈 수 있으리오 하고 세초(細초 : 비단)한필을 주면서 짐의 왕비가 짠 비단이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 지내라 하므로 사자(使者)가 돌아와서 그대로 아뢰고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다시 밝게 되었다. 그 비단을 어고(御庫)에 소중히 간직하고 귀비고(貴妃庫)라 이름하고 제사하던 곳을 영일현이라 하였다.

5년 무수(戊戌)에 죽령(竹嶺)에 길을 개통하다 이해에 왜인이 와사 문안(問安)하다.

9년 임인(壬寅)에 사도성 영덕(沙道城;盈德)에 하사 수비군을 뤼로하다.

12년 을사(乙巳) 아찬길선(阿찬吉宣)이 백제에 도망한지 오래므로 왕이 편지하여 돌려보내기를 꾸짖으시니 백제가 듣지 않음으로 왕이 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攻擊)을 가하여 철병하여 돌아오다.

14년 정미(丁未)에 백제가 서쪽 변방의 두성을 함락시키고 천인을 포로해 가거늘 왕이 일길찬 흥선(一吉찬 興宣)에게 명하여 2만 병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고 왕이 또 친히 기병을 이끌고 한수(漢水)로부터 처들어가니 백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노획한 것을 돌려 보내고 화친(和親)하기를 청하였다.

20년 계축에 왜인이 사자(使者)를 보내 문안하다.

321년 갑자(甲子) 3월에 왕이 후하시니 왕위를 일을 만한 사람이 없는지라 왕의 아들 벽방(碧芳)이 일찍죽고 손자 무영(武英)이 있었으나 무사(無嗣)라고 한 것은 어진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나라 사람들이 탈해의 손자 벌휴(伐休)을 세워 임금을 삼고 아달라왕을 국도 남쪽 15리 배일산 묘좌에 장사하다.

벌휴왕 석씨(昔氏)로부터 3세를 지내 김씨 미추왕(金氏 味鄒王)에게 전하고 미추왕이 다시 석시 유래왕(儒禮王)에게 전하여 2세를 지내고 다시 김씨 내물왕에게 전하니 김씨가 35세를 지내고 다시 박씨에게 전하여 신덕왕(神德王)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신라 제53대 신덕왕기(神德王紀)
신라 제53대 신덕왕의 휘는 경휘(景暉)니 예겸(乂謙)의 자로 아달라왕의 후손이다. 왕위에 계신지 5년이요 능은 아달라왕 능원내 묘좌이다. 비(妃)는 의성왕후 김씨니 능은 영산 자좌이다. 원년 임신(壬神)에 아버지를 선성왕(宣聖王)으로 어머니를 정화태후(貞和太后)로 추존하고 비를 의성왕후(義成王后)로 봉하고 아들 승영(昇英)을 태자로 삼았다.

김씨의 효공왕이 훙(薨)하매 왕을 찬양하고 조회(朝會)하는 사람들이 모두 신덕왕에게 와서 우리 임금 박씨는 아달라왕의 후손이라 하였으니 시조왕의 쌓이고 쌓인 여경(餘慶)을 이에 가히 증험하겠으며 아달라왕 께서도 자손이 있음을 이에 증거할 수 있도다.

이해에 동해용왕이 옥적(玉笛)을 올리니 황옥(黃玉)과 청옥(靑玉)이다 길이가 일척(一尺 9寸)) 9촌이며 소리가 맑고 명랑하여 대대로 간직해온 보배다. 고려왕이 구경하고저 하여 사람을 보내서 가져갔는데 조령(鳥嶺)을 지나서부터 불어도 소리가 나지 않으므로 고려왕이 신령한 물건임을 알고 돌려 보내었다.(지금 경주 악부(樂府)에 보관하고 있다.)

황제(黃帝)가 풍류를 베풀며 고기와 용이 나와서 듣고 제순(帝舜)이 소(韶)를 연주하니 봉황(鳳凰)이 와서 깃들었다 하는데 우리 신덕왕이 등극 우매 용왕의 옥적이 지금도 오히려 조령 서쪽에서는 소리를 내지 않으리 신의 신령스러운 덕이 더욱 나타남이라 하겠다.

4년 을해 걸단(걸丹)에 사자(使者)를 보내다. ▶6년 정축 (丁丑) 왕이 후(薨)하시매 태자 승영이 왕위에 올라 신덕왕을 아달라왕 능안에 안 묘좌(卯坐)에 장사하고 시호(諡號)를 신덕이라 올렸다.
신라54대 경명왕기(景明王紀)
신라54대 경명왕은 신덕왕의 태자니 휘는 승영(昇英)이요 왕위에 계신지 7년이다. 능은 아달라 왕능 안 묘좌다. 비는 석씨니 능은 서화산 자좌다 .원년 정축(丁丑)에 석씨를 봉하여 왕비를 삼고 아우 위응(魏膺)으로 상대등 대아찬을 삼고 유염(裕廉)으로 시중을 삼다. 팔공자를 봉하니 맏분은 밀성대군 휘 언침이시고 다음분은 고양대군 휘 언성이시고 셋째분은 속함대군 휘 언신이시고 넷째분은 죽성대군 휘 언립이시고 다섯째분은 사벌대군 휘 언창이시고 여섯째 분은 왕산대군 휘 언화이시고 일곱째분은 강남대군 휘 언지이시고 여덟째 분은 월성대군 휘 언의이시다.

2년 (918년)이길찬 현승(玄昇)이 반역을 꾀하거늘 참수(斬首)하다 이해에 왕건이 고려를 세우다.

4년 경진(庚辰)4월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맺다. 10월에 견훤이 대량협과 구사(仇史) 두 고을을 함락(陷落)시키고 진례군(進禮郡)까지 침입하니 왕이 아찬 김율(金律)을 고려에 보내 구원을 청하니 견훤이 듣고 물러가다. 이때에 견훤이 자주 침입하므로 고려가 장수 박수경(朴守卿)을 보내서 왕경을 수호하게 하였다.

5년 신사(辛巳) 정월에 김률을 고려에 사신 보내니 고려왕이 묻기를 신라의 장륙상(丈六像)과 구층탑(九層塔)과 성대(聖帶)가 있는데 이것을 삼보(三寶)라 하였는데 성대도 아직 있는가? 김률(金律)이 대답을 못하고 돌아와서 왕께 고하니 여러 신하에게 물어보아도 알지 못했는데 그때 황용사의 구십여세 되는 늙은 중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진평왕(진평왕)께서 쓰시던 것으로 지금 남고(南庫)에 수장(收藏)되어 있으나 둘레가 심히 길어서 보통 사람은 맬 수 없습니다.” 하였다.

2월에 말갈(靺鞨)의 별부에 달고(達姑)의 무리 백칠십인이 침입하여 삭정군(朔庭郡)을 경유 하는지라 고려장군(高麗障軍) 견권(堅權)이 쳐서 물리치니 왕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시다.

8년 갑신 8월에 왕이 훙(薨)하시니 아우 위응(渭膺)이 왕위에 올라 경명왕을 신덕왕릉안 묘좌에 장사하고 시호(諡號)를 경명이라 올리니 이것을 삼릉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이라 한다. 고려에 국상을 고하니 고려왕이 애도의 뜻을 표하고 사신을 보내 조위(弔慰)하다.

신라55대 경애왕기(景哀王紀)
신라55대 경애왕은 경명왕의 동생이시니 휘는 위응(魏膺)이요 왕위에 계신지는 3년이며 능은 배일산 삼릉의 좌록 묘좌이다 비는 석씨이다.

2년 을유에 석씨를 왕비로 봉하다. 이해에 고을부(고을부)의 장군 능문이 신라를 배반하여 고려에 황복하니 고려왕이 고을부는 왕도와 가깝다고 해서 위로해서 돌려보내고 그 부하 배근(盃近)이 무리만 머물러 있게하다.

4년 정해(丁亥)9월에 견훤(甄萱)이 왕도 가까이 몰려드니 왕이 고려에 급보를 전하니 고려왕이 공훤(公萱)등 일만병력(一萬兵力)을 보내서 구원하려 하였으나 고려병이 도착하기 전에 견훤이 왕도에 쳐들어왔다. 그때 왕은 비빈(妃嬪)과 종적(宗적)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술마시고 즐기다가 견훤의 쳐들어옴을 듣고 왕과 왕비가 도망쳐서 이궁(離宮)에 돌아오니 시종(侍從;모시는 신하)과 궁녀와 영관들은 모두 포로가 되고 견훤병은 약탈을 자행하여 공사의 재물을 거의 빼앗고 왕궁에 들어가서 왕을 찾아내어 군중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하고 부하를 시켜 빈첩(嬪妾)들을 간음하게 하고 왕의 동생 효렴(孝廉)과 재신(宰臣 : 지위 높은 벼슬아치)을 포로하고 자녀(子女) 백공과 병기(兵器)와 보화를 탈취해 가거늘 고려왕이 사신을 보내서 조위 하고 친히 정병을 거느리고 공산의 동숲에 맞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견훤병의 포위(包圍)가 심히 위급하므로 고려의 대장 신숭겸(申崇謙)이 왕을 위해 싸우다 죽으매 왕은 이틈을 타서 간신히 몸을 빠져나와 도망하였다. 이에 신라의 왕비는 왕의 고종제(姑從弟) 김부(金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이분이 경순왕(敬順王)이다. 왕은 군신들과 함께 경애왕의 시체를 서궁(西宮)에 모시어 통곡하고 경애(景哀)라고 시호(諡號)를 올리고 삼릉의 좌록 묘좌에 장사하다. 대아찬(大阿?) 검교상서(檢校尙書) 좌복야(左좌僕복야) 박술홍(朴術洪)은 비문함을 이기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서 평생을 숨어살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9년 을미 에 경순왕이 국력이 약하고 외로워서 고려에게 나라를 양도하니 신라가 드디어 망하다.

박씨의 왕조가 전기에 七왕 후기에 三왕이니 합하여 10왕으로 232년 동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