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뿌리/동호공파

기산사지(箕山祠址, 舊遺愛祠)

梅谷 2010. 9. 26. 08:52

기산사지(箕山祠址, 舊遺愛祠)

 

기산사지는 함평읍 기각리(箕閣里) 현 기산초등학교 자리에 소재했었다. 기산사는 원래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출을 지지하는 이 지역 선비들의 상소를 막았던 당시의 함평현감 동호(東湖) 박정원(朴鼎元∶1574~1626)을 제향하는 사우로 1705년(숙종 31)에 건립하였던 유적이었으나 현재는 유허터만 남아 전한다. 이같이 기산사가 창건되는 것은 박정원이 죽은지 80년이 되던 1705년(숙종 31)에 그의 충의가 조정에 알려져 대사간으로 증직된 것과 때를 같이 한다.

박정원(1574~1626)은 자를 계선(季善), 호를 동호(東湖)라 하였고 본관은 밀성이다. 1609년 사마시에 합격 광흥봉사(廣興奉事)를 거쳐 1616년(광해군 8)에는 문과에 합격하여 승정원 주서(注書)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그는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함평현감으로 내려와 있었는데, 1618년(광해군 10) 이해(李垓) 이위(李偉) 윤유겸(尹惟謙) 등 57인이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의 앞잡이가 되어 인목대비를 폐출하여 선비의 책임을 다한다는 말로 각 군에 선전하자 인접 고을 선비들의 찬성 상소가 준비되고 그 장소가 함평향교로 정해졌다. 그는 이같은 모임을 막아 함평의 유림들이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당시 대사간 윤인(尹認) 사간 신광업(辛光業) 정언 이원여 등이 박정원은 본래 딴 뜻이 있어 대론을 막고 폐모론을 반대하더니 함평으로 내려간 뒤 더욱 그 뜻을 펴려고하여 호남유생들이 함평에 모였을때 내쫓고 또한 함평유생들로 하여금 상소하는데 일체 참여치 못하게 하였으니 역을 보호하는 그 죄가 마땅히 징계치 않을 수 없다라고 탄핵하게 되자 이로인해 은퇴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후에도 그는 상황이 급전되어 그의 용단이 널리 알려졌으나 결코 앞에 나섬이 없이 은인자중하여 칭송을 받았다. 곧이어 조정의 공론으로 흥양현감이 되었고, 이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때는 순찰병마사로 대가를 호종한 공으로 호조정랑겸 춘추기주관에 승배 되었다. 그리고 1625년(인조 3) 평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사직 하고 여강정사에서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사후 80여년이 지난 1705년(숙종 31) 당시 우의정이었던 녹천 이유의 상소로 대사간에 증직되었고, 또한 그해 정월에는 함평사림들이 발의하여 규약을 만들고, 7월에는 기산 아래 영수 물가에다 사우를 건립하여 공을 배향하게 되었다. 그의 행적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지명과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지은 묘갈명에 상세히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동호 박정원의 행적은 당시의 호남지역의 사림 분위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자료가 된다. 이는 당시 정치세력화한 재지사족이 분열된 모습을 이 사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이해․이위․윤유겸 등 57인의 존재는 소위 대북파와 연결된 호남지역 세력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이들 대립되는 지방 사림들의 동향과 이 사우의 존립, 발전은 직결되어 있었으리라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서원․사우의 기록에는 동호 박정원만을 독향하였던 사우로 기록하고 있으나, ?속수함평지?(1930년간) 권2, 사우조의 기록에는 박정원 이외에도 함평현감을 역임했던 오이익(吳以翼∶1618~1666), 이관징(李觀徵∶1618~1695), 이후정(李后定∶1631~1689), 이교악(李喬岳∶1653~1728), 임덕제(林德蹄, 1722~1774), 강시환(姜時煥∶1766~ ? ) 등을 제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주목된다.

현재로서는 이들 여러 제향인들이 누구에 의해서, 또는 어떠한 절차를 거쳐 이 사우에 배향되게 되었는지는 확실한 자료가 없어 알 길이 없다. 다만 이들은 모두 함평현감으로 재임하였던 인물들이며,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불우한 입장에 처했던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이를 애석하게 생각한 이 지방 유림들에 의해 추배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추배시기는 현재 전해지는 자료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1930년에 간행한 ?속수함평지?의 읍재선생안(邑宰先生案)에 이들 추배인물들 가운데 강시환이 함평현감으로 재임했던 시기가 1816~1817년으로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이들의 추배시기는 1817년 이후일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현재 기산사의 유지로 알려져있는 기산초등학교에는 사우에 대한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기산사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지금까지 함평공원에 유애비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금번 조사를 통하여 실제 박정원과 기산사에 관련된 유애비는 없었다. 이는 1625년에 함평현감으로 도임하였던 <현감박공정청위선정비>(1627년, 높이 128㎝, 폭 61㎝, 두께 22㎝)를 기산사와 관련된 박정원의 유애비로 잘못 파악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최근 필사본인 ①<동호박선생사적>이 발견되어 기산사에 관련된 유애비의 내용과 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다. 사적기에 기록된 유애비에 관한 내용으로는 ②<박후정원청덕인위비>(1618년 건립, 1676년 개수)라 되어 있고, 또한 이 사적기에 수록된 ③채색의 서원 배치도와 서원조성 당시의 임원명단 등은 이 사우의 연혁을 보완하는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호박선생사적기>에 의하면 사우의 좌측에 비각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박정원 이외에 기산사에 제향되었다고 하는 역대 함평현감들 가운데 현재 비가 함평공원에 남아 있는 것은 ④<현감오후이익청백명간휼민선정비>(무술년, 높이 96㎝, 폭 48㎝, 두께 12㎝)과 ⑤<현감강후시환선정비>(1822년, 높이 156㎝, 폭 66㎝, 두께 19㎝) 뿐이다.

 

함평군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