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q쟁이

고조선은 중국 내몽고 자치구에 있었다 본문

역사[문화]

고조선은 중국 내몽고 자치구에 있었다

梅谷 2007. 11. 21. 11:51

고조선은 중국 내몽고 자치구에 있었다.    [신동아]

아직도 한국인은 고조선이 대동강가의 평양에 있었다고 믿고 있다. 기자가 단군에 이어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한다면, 한국인은 기원전 1000년 무렵 중국이 한반도 북부를 다스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처지로 몰리게 된다.

이러한 중국의 도발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론을 펴온 이가 단국대 윤내현 명예교수(중국사)이다. 중국 사료 연구를 통해 고조선사를 연구해온 그는 기자조선은 물론이고 낙랑·진번·임둔이 난하~대릉하 사이인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단언한다.

그가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중국 고대 역사서인 ‘한서(漢書) 지리지’와 ‘진서(晉書) 지리지’인데, 두 책에는 ‘기자가 망명해 간 곳은 낙랑군에 있는 (28개 현 가운데 하나인) 조선현이다’”라는 주()가 달려 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는 조선현 근처에 수성현이 있다고 기록해놓았고, ‘진서 지리지’는 수성현에는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다는 기록을 담고 있다. 그리고 사마천이 쓴 ‘사기’는 갈석산을 ‘발해 서북쪽, 난하 유역에 있다’고 기록해놓았다.

기자조선은 북경 부근에 있었다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갈석산을 찾아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지금도 난하 북동쪽에 갈석산이 있기 때문이다. 수성현은 난하 유역에 있는 갈석산을 끼고 있었고, 수성현 옆에 조선현이 있었다니 조선현도 난하 부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중국 명나라 때 나온 역사책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난하 하류에 영평부가 있는데 영평부에는 기자가 정착했다는 조선성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기자가 있었다는 조선현은 난하 하류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기자조선이 주나라의 제후국이라면 주 무왕은 기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는데, 이는 기자가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땅으로 갔기 때문이다. 기자가 간 곳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거수국이다.

기자의 후예가 이끈 조선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이가 위만이다. 한무제는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이끄는 조선(기자조선)을 멸하고 낙랑군 등 4개 군을 설치했으니, 낙랑군도 난하 부근에 있어야 한다.

‘한서 지리지’ 등은 이미 난하 인근에 있는 ‘조선현이 낙랑군 안에 있었다’고 했으니,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낙랑 등 4개 군도 난하 부근의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기원전 1100년은 고조선이 주나라에 맞서면서 기세가 등등하던 때였다. 그렇다면 당시의 중국인들은 난하 동쪽을 전부 조선으로 불렀을 것이다. 기자는 조선 땅으로 망명해갔고 무왕은 형식적으로 그를 조선왕에 봉했을 뿐이다. 이 지역을 관할하는 고조선은 망명해온 기자에게 변방 지역의 통치를 맡기고, 그가 이끄는 나라(기자조선)를 거수국으로 거느렸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기자조선 옆에 있던 낙랑·진번·현도 등 소소한 국가도 모두 고조선의 지배를 받다가 한나라 때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고구려도 요서지역에 있었기에 한나라 때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주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 유지된 왕조이다. 봉건제도 덕분에 잘나가던 주나라는 이 봉건제도 때문에 ‘결정적인 한 방’을 맞게 된다.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주변 제후국이 이민족을 자꾸 공격함으로써 유지되었기에 거꾸로 이민족의 공격을 불러들이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인은 주변에 있는 종족이나 나라를 오랑캐로 불러왔다. 동쪽에 있는 오랑캐는 동이(東夷), 서쪽에 있으면 서융(西戎), 남쪽은 남만(南蠻), 북쪽은 북적(北狄)으로 표기해왔다.

고조선도 춘추시대를 겪었다

서융은 유럽대륙에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훈족 또는 흉노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나라는 서융의 대표인 ‘견융(犬戎)족’과 자주 다퉜다.

싸움은 주나라가 먼저 걸었다. 그로 인해 절치부심하던 견융족이 기원전 771년쯤 주나라로 쳐들어와 수도인 호경을 파괴하고, 주나라 12대 왕인 유왕(幽王)을 살해했다.

견융족의 침략에 놀란 주왕가는 동쪽으로 도주해 낙읍(洛邑, 지금의 하남성 낙양)을 새로운 도읍으로 삼고, 평왕(平王)을 새 왕에 앉혔다. 견융족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호경을 수도로 한 주나라를 ‘서주(西周)’라고 하고, 낙읍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의 주나라를 ‘동주(東周)’라고 한다.

동주는 넓은 직할영지를 갖고 있었으므로 동주의 왕은 여기서 나오는 소출로 강력한 상비군을 편성했다. 그러나 서주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낙읍으로 쫓겨 온 서주는 직할영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소출을 받지 못하고 제후국의 지원으로 근근이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부터는 주왕실을 등에 업은 제후국이 힘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수렴청정’을 하듯이 권력을 확보한 제후는 주왕실의 권위를 이용해 다른 제후국에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된 것. 그로 인해 제후국들은 ‘주왕실을 받든다’는 명분을 내걸고 패권을 노리는 전쟁에 들어갔는데, 이를 가리켜 ‘춘추시대’라고 한다.

춘추시대의 갈등이 지속되던 기원전 475년쯤 주나라 제후국 가운데 하나인 진()나라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진공 밑에 있던 한(), (), ()씨의 3대부 가문이 진공을 쫓아내고 진나라를 3등분해,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른 제후국들도 주왕실이 내린 작위를 버리고 왕을 자처했다. 이로써 유명무실한 주왕실이 해체되고, 자칭 왕을 내세운 국가끼리 싸우는 시대로 들어갔는데, 이를 가리켜 ‘전국(戰國)시대’라고 한다.

전국시대는 ‘7웅’이라고 하는 일곱 나라의 힘이 셌다. 7웅 가운데 하나인 연()나라는 지금의 북경 부근에 있었다. 상시적으로 전쟁을 치러온 연과 고조선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이마니시와 윤내현

고구려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는 많아도 고조선이나 단군을 연구하는 학자는 적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첫째, 단군은 신화 속 인물일 수 있다는 부담 때문일 것이다. 둘째로는 한국에서는 고조선의 무대를 밟아볼 수 없다는 것이 꼽힌다.
그러나 일본 학자는 단군에 대해 연구했다. 단군을 연구한 일본 학자로는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 1932)가 대표적이다. 1903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조선사를 연구하고 1914년 교토제국대 조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에 임명돼 단군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내용의 논문 ‘단군설화’를 발표했다. 이 논문이 나온 후 한국에서는 단군을 신화 속의 인물로 보는 시각이 강해졌다. 이마니시는 안정복이 주석을 단 중종본 ‘삼국사기’도 발굴했다. 그는 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간행한 삼국유사 중종 임신본 고조선 편에 있는 ‘석유환국(昔有桓)’이란 문구를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변조한 혐의도 받고 있다.
석유환국은 ‘옛날(고조선 이전)에 환국(한국)이 있었다’는 뜻이니, 환국의 존재는 보다 명쾌해진다. 그러나 나라 국자를 인할 인()자로 바꿔버리면 ‘옛날에 환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의미로 풀이돼 그 뜻이 확연히 축소된다. 이 때문에 많은 학자가 분노했다.
이마니시 류는 문헌고증을 통한 사학을 이 땅에 전수한 학자이다. 그런데 그의 영향으로 한국 사학계는 문헌고증에 지나치게 경도돼, 문헌에 나오지 않는 것과 위서(僞書) 시비가 있는 사료는 아예 보지않으려는 전통이 생겼다.

일본 학자가 단군을 연구해 설화 속 인물이라고 단정하자 그 많은 한국 사학자가 이를 뒤집지 못하는 것은 이마니시 류에 의해 도입된 문헌고증학이 끼친 악영향이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강단(講壇) 사학계가 이마니시 콤플렉스에 빠져 있을 때 이를 극복하려고 한 대표적인 학자가 단국대의 윤내현 명예교수이다.
그는 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를 전공했다. 그래서 이마니시 류의 사관에 얽매이지 않고 중국사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를 연구할 수 있었다.
그가 정리한 고조선사는 중국사와 얽혀 있는 관계사이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중국과 숱하게 싸우면서 유지돼왔으니 관계사가 아니고는 고조선과 고구려를 정리하기 어렵다. 그는 중국 사료에 나오는 자료를 근거로 한국 고대사를 복원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윤교수는 고조선이 요서(遼西)에 있었다는 학설을 내놓았는데, 이마니시의 학설을 따르는 국내 학자들은 이를 부인하고 그를 이단자로 몰았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내몽고 자치구에 황화 문명과 구분되는 청동기 문명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윤 교수 주장이 근거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재야 사학계를 중심으로 고조선이 난하 부근에 있었다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펼치며 고조선사는 물론이고 만주와 북한까지 삼키려고 하는 지금 윤 교수의 학설은 동북공정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이 되고 있다.

 

고조선 세력에 위협을 느낀 연은, 소왕(昭王·기원전 311~279) 시절인 기원전 300년경 전투 경험이 많은 진개(秦開)를 앞세워 고조선 정벌에 나섰다. 당시 중국인들은 말과 마차를 연결한 전차를 전투에 사용하긴 했어도, 개개의 병사가 말을 타는 기마술(騎馬術)은 익히지 못했다.

기마는 북방 유목민족의 전유물이었는데, 진개는 북방 유목민족을 통해 기마술을 익힌 사람이었다. 기마병을 이끈 진개 군은 요하 부근까지 쳐들어갔다.

그로 인해 요서지역에 있던 고조선이 큰 타격을 입고 동쪽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견융의 공격을 받은 주나라가 동쪽으로 밀려나 ‘동주’가 되듯, 고조선도 진개 군의 공격을 받아 동쪽인 한반도 북부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190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돼 있는데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것이 기원전 2333년이라면, 단군이 통치를 끝낸 시기는 기원전 425년이 된다.

기원전 425년경과 진개 군이 쳐들어온 기원전 300년쯤 사이 고조선은 힘이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진개 군의 공격으로 고조선은 세력을 더욱 크게 힘을 잃었다.

진개 군의 공격이 끝난 후 고조선은 난하 지역을 회복하지만 그 힘은 과거에 비해 크게 약해졌다. 이 시기 고조선은 춘추시대 같은 혼란기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의 지배력이 급격히 약해진 데는 철기의 보급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단조(鍛造)술이 끼친 영향

--주로 이어지는 중국의 ‘3대’와 한민족의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이끌던 국가이다. 이 시기 지배층은 청동기를 독점했다. 청동기는 권력과 부를 보장해주는 보증수표였으므로 지배층은 청동기 제조술이 피지배층에게 흘러가는 것을 차단했다.

피지배층은 간석기나 나무 등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병장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광석을 녹여 도구를 만든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도구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광물을 녹여보려고 노력했다.

청동기의 재료는 구하기 어렵지만 철광석은 쉽게 구할 수 있다. 기원전 10세기 무렵 중국인과 한민족은 철기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만든 철기는 불순물이 많은 무쇠(鑄鐵)라 단단하지 못했다. 떨어뜨리면 쉽게 깨졌고 청동기처럼 날카롭게 만들 수도 없었으니, 이 철기는 병장기나 땅을 파는 농구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뭔가를 눌러주고 받쳐주거나 마찰력을 견뎌야 하는 곳에는 사용할 수 있었다.

병장기가 되지 못하는 철기는 위협이 아니었으므로 지배층은 피지배층이 철기 만드는 것을 용인했다.

철기가 보급되자 점차 농업의 생산력이 높아졌다. 그로 인해 과거에는 개간하지 못하던 땅을 개간할 수 있게 되면서 땅에 대한 소유욕이 강해졌다. 이러한 소유욕은 새 땅을 확보하려는 전쟁을 낳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봉건제도를 통한 주나라의 확대이다. 확보할 수 있는 땅이 줄어들면 제후국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기원전 10세기 무렵, 초기 철기 문화가 생기면서 고조선의 거수국 사이에서도 새로운 땅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진개 군의 공격을 받은 후 고조선의 통치력이 상실되자 거수국끼리 패권을 다투는 경쟁이 격화되었다. 이 경쟁에서 우세를 점한 것이 부여이다. 그러나 부여는 모든 거수국을 장악할 정도로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비슷한 시기 중국과 고조선은 분열기로 접어들었는데, 이 분열은 새로운 병기가 등장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새로운 병기는 바로 ‘단조(鍛造)한 병장기’이다. 단조는 쇳물을 형틀에 부워 식힌 것을, 다시 불에 넣고 시뻘겋게 달군 후 망치로 때리고 물에 넣어 급랭(急冷)하는 것을 반복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을 하면 청동검보다 훨씬 더 강하고 날카로운 철검(鐵劍)을 얻을 수 있다.

철검과 철창으로 무장한 세력은 청동검과 청동과(, ) 그리고 간석기로 무장한 세력을 압도할 수 있다. 철광석은 도처에서 구할 수 있어 단조술을 익힌 세력은 단기간에 세력을 확대한다. 청동기 시절에는 토성이나 깨어진 돌로 성을 쌓았으나 단조 철을 만들면서부터는 돌을 자유자재로 자를 수 있어, 돌로 된 성과 건축물을 쌓았다.

중국에서 단조 기술은 전국시대 말기에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단조 병장기와 농구가 보급될 무렵인 기원전 222년 진()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 이듬해 중국을 통일했다(기원전 221).

오랜 분열기를 끝낸 만큼 진시황은 강력한 통일 정책을 펼쳤다. 영토의 통일뿐만 아니라 철학의 통일이 필요했으므로, 진시황은 진나라의 이념이나 사상과 맞지 않는 책과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학자를 없애버리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했다. 그러나 지나친 억압정책으로 통일 14년 만인 기원전 207년 진나라가 무너지고,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와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 갈등은 기원전 202년 유방이 승리함으로써 중국은 다시 통일되었다. 한나라는 중간에 신()나라가 등장해 잠시 잘리긴 했으나, 기원 220년까지 400여 년 간 존속하며 중국을 하나로 묶었다.

쇠를 단조한 병기에다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술까지 받아들였기에 한나라의 군사력은 매우 강했다. 이를 바탕으로 양자강 이남까지 영토를 넓히고 서쪽으로도 영토를 확장했다. 이때부터 화하족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한족(漢族)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춘추와 전국의 혼란기는 화하족인 지배층과 이민족인 피지배층을 하나로 녹이는 용광로 구실을 했다. 그리고 진과 한이라는 통일왕조가 등장함으로써 주나라의 품안에 있었던 이민족은 형틀에 부어져 굳은 무쇠처럼 한족으로 굳어졌다. 거대 중국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한나라가 동쪽으로 공세를 퍼부어 기자조선을 멸망시켰다(기원전 108).

기자조선은 연나라가 망하던 기원전 200년쯤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들어온 위만을 받아들였다. 기자조선은 위만에게 서쪽을 지키는 임무를 맡겼는데 위만은 쿠데타를 일으켜 준왕(準王)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는 것은 중국 사료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우리 사료인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에 나온다. 이 기록에 따르면 왕위를 빼앗긴 준왕은 배를 타고 마한 땅으로 들어와 한왕(韓王)이 되었다고 한다. 기자조선이 대동강 부근에 있었다면 배를 타고 마한 땅으로 갈 이유가 없다. 기자조선이 난하 부근에 있었기에 준왕은 배를 타고 한반도로 들어갔다고 보아야 한다.

청주 한씨 세보(世譜)는 준왕이 우성과 우평 우량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각각 기()씨와 선우(鮮于)씨 그리고 청주한()씨의 선조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준왕이 한반도로 도주한 것은 한반도가 고조선의 강역(彊域)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조선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右渠王)이 통치하던 기원전 108, 한무제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기자조선 옆에 있던 낙랑·진번·임둔 등 고조선의 거수국도 함께 무너졌다. 이곳은 중국과 가까운 곳이기에 한무제는 이곳을 한나라 영토로 편입시키며 한4군을 설치했다.

그러는 사이 고조선 땅에서도 단조술이 확산되면서 거수국들을 하나로 묶어 통일을 이룩하려는 조짐이 일었다. 이 노력의 선봉에 선 것이 부여와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부여와 손을 잡음으로써 세력을 급격히 확대했다. 그러나 요서지역을 포함한 고조선의 옛 강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나라의 쇠락을 기다려야 했다.

기원 222년 한나라가 무너지면서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하는 4세기에 걸친 긴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거수국

고구려 5대 왕인 모본왕은 후한 때인 기원 55년경 난하 유역으로 쳐들어가 점령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 때 이곳을 점령하고 있었다는 것이 평양 덕흥리 고분의 자료로 확인되고 있다. 고조선의 옛 영토를 되찾은 것이다. 그후 고구려는 서진을 멈추고 한반도 남쪽을 공략한다. 장수왕 때 본격적으로 남쪽을 공략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거수국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 신라가 왜군의 공격을 받자 왕이 5만명을 보내 왜군을 내쫓았는데 이는 고구려가 신라를 거수국으로 거느렸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국이 수나라와 당나라로 다시 통일되자 과거 고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고구려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수나라의 공격은 잘 막아냈으나 이어서 등장한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실패하면서 고구려가 사라졌다.

고·당 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의 거수국이었던 신라가 대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사라진 만주에서 발해가 일어났다. 그러나 발해는 신라 이상으로 친당(親唐) 정책을 취했기에 신라와 통일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발해는 요하 서쪽으로는 진출을 기도하지 않았으므로 고조선의 무대인 요서지역이 중국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발해가 사라진 후 만주에서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거수국이었던 거란()과 여진(, )이 일어났다. 거란과 여진은 고구려에 대한 귀속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거수국이던 신라 땅에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칭하는 고려가 일어났다. 고려와 조선은 차츰차츰 북진을 거듭해 압록-두만강까지 진출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학자들은 “한국사를 한반도에 한정해서 보는 ‘반도사관(史觀)’으로는 고조선과 고구려를 담아놓기 힘들다”라고 말한다.

한민족은 절대 단일민족이 아니다. 구석기 신석기 시대부터 이 땅에 살았던 종족, 남방에서 배를 타고 들어온 세력, 그리고 북서쪽에서 이주해온 종족이 합쳐서 한민족을 이루었다. 그러나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장악하고 문화를 이끌어간 세력은 내몽고 쪽에서 이동해온 세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를 이룬 이들은 하늘을 숭상하는 한민족이었기에 해가 뜨는 동쪽으로 이동해 한반도로 들어왔고, 그중 일부는 철기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민족의 불행은 중국인에 비해 인구가 현저히 적었다는 것과 단조 철기를 만드는 데 한발 뒤처졌다는 데서 비롯됐다. 화하족은 대륙에 자리잡은 탓에 남쪽과 서쪽으로 ‘거의 무한히’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인구를 늘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자(漢字)라는 문자를 갖고 있었던 것도 중국이 가진 큰 힘이었다.

羊島史觀을 벗어나야

지금은 거란과 여진 등 고조선과 고구려의 거수국 후예가 모두 사라져버렸으므로 한반도에 있는 한민족만이 유일하게 고조선과 고구려의 후예가 되고 있다. 그런데 그 사이 요서와 요동 그리고 북만주 전체가 중국의 정치 영토가 되었다는 이유로 중국은 이 땅에 있었던 고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발해사를 그들의 역사로 가져가려고 한다.

한민족은 주변 민족과 갈등하고 협력하는 관계사(關係史) 속에서 국사를 이어왔다. 국사라고 해서 한국 자료만 보라는 법은 없다. 지금도 한민족의 안보는 여야 정당 간의 권력다툼이나 노사갈등보다는 미국 중국 일본 등과의 외교관계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는다. 한민족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이민족과 엮어온 관계사를 연구하지 않고 내부 권력 다툼만 연구하는 국사로는 제대로 된 사관(史觀)을 만들 수 없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외국인은 ‘북한 정권이 붕괴했을 때 누가 북한지역을 안정시키는 일을 할 것인가’란 질문에 “6자회담을 하기 위해 북한을 제외한 다섯 나라 대표가 모였을 때, 북한 정권이 붕괴하면 북한을 국제공동관리하기로 약속했다. 한국이 단독으로 북한을 통치하진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북한 지역의 치안이 확보되었을 때 북한에 들어온 중국을 떠나게 하고 통일을 이루려면 지금부터라도 중국에 대한 연구를 강화해야 한다. 동북공정으로 드러난 중국의 속내를 파악하고 그 대책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반도사관을 벗어나 고조선과 고구려사를 큰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