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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박씨 대제학공 휘 윤문 행장 본문

나의뿌리/충헌공파

밀성박씨 대제학공 휘 윤문 행장

梅谷 2021. 1. 6. 12:42

《대제학공 휘 윤문 행장[大提學公 諱 允文 行狀》

 

동방의 대가[大家]요 며문의 고귀한 족인[族人]으로 장상[將相]을 겸한 자질에 덕망이 우뚝 높이 웅장[雄壯]하고 명성에 위엄[威嚴]이 우렁차 공명을 새긴 고귀한 집안으로 역사에 길이 빛남이 기술[記述]된 시종결점[始終缺點]없는 가문이란 또한 세상에서 드믈 게 있음이니 지금 대광공밀성군[大匡公密城君]의 가문에서 볼 수 있도다.공의 성[姓]은 박[朴]씨요 휘는 윤문(允文)이오 자[字]는 질부[質夫]니 계출[系出]은 신라의 경명왕자인 밀성대군으로 그 세대를 이어옴이 멀고 멀도다.

 

그 후로 자손들이 불어나 본관[本貫]을 밀성[密城]으로 하였더라. 공의 증조 휘는 척[陟]이니 고려 충선왕조의 내부시승[內部侍丞]으로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에 봉작[封爵]되고 추은[推恩]으로 가상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시호를 충헌[忠憲]으로 추증하고 사패지[賜牌地]를 내려 봉사케 하고 공신의 자손으로 하여금 세세로 질녹[秩祿]을 수급[授給]하였다.

조[祖]의 휘는 성진[成進]이니 조현대부[祖顯大夫]에 흥위위[興威衛]에 정룡장군[精勇將軍]으로 황증문하평리[皇贈門下評理]이고 고[考]의 휘는 원[原]이니 판전교사사[判典敎寺事]에 규의선력공신[揆儀宣力功臣]으로 밀성대군에 봉작[封爵]되고 황증문하찬성사[皇贈門下贊成事]이다.비[妃 ]는 밀성군 부인 손씨[孫氏]이니 급제[及第]한 홍권[弘權]의 여[女]이다.



공[公]휘 윤문(允文)은 밀주의 풍각화산 본가에서 출생하니 기개[氣槪]가 높고 절조[節操]가  굳고 우람한 위엄[威嚴]으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널리 달통하여 장차 크게 쓰임의 자질이 있어 충숙왕 원년에 급제에 올라 벼슬이 삼중대광보문각대제학[三重大匡寶文閣大提學]에 이르고 밀성군에 봉작되었다.

충목왕 원년에는 문사[文士] 38인을 선출[選拔]하여 날짜를 바꾸어가며 시독[侍讀]할 때 공은 기거랑[起居郞]주참[注참]하여 저술 하였다.배[配]는 해양군부인 광산김씨[海陽郡夫人光山金氏]이니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치사[致仕]하고 시호 문정공(文正公)인 김태현[金台鉉]의 여[女]이며 랑장[郞將]인 왕정조[王丁朝]의 외손녀이다. 

 

천성이 온숙[溫淑]하고 서사[書史]를 두루 거치고 나이 젊어서 박씨 가문에 시집가서 부도[婦道]를 수행하고 시부모[媤父母]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효[友孝]하고 자손들을 골고루 화애[和愛]하고 자비심이 노비[奴婢]까지 이르르고 의복음식[衣服飮食]까지 두루 돌아가게 하기를 법도[法道]에 맞게하니 대광공은 [大匡公]은 호예군자[好禮君子]이고 부인[夫人]또한 예절의 여자 교훈[女子敎訓]이 되니 

 

이것을 이르기를 가히 군자의 배필로 마땅함이니 복 받음이 면면[綿綿]이 이어져 자손이 많아 6남이 생장[生長]한 장남은 밀양[密陽]이니 과거[科擧]에  올라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하고 봉순대부판전교시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로 밀산군[密山君]에 봉작[封爵]되고 차남[次男]은 대양[大陽]이니 과거에 올라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으로 삼중대광전법판서[三重大匡典法判書]로 익조공신[翊祚功臣]의 밀천군[密川君]으로 봉작[封爵]되고 3남[三男]은 소양[昭陽]이니 진사로서 지절[志節]이 크고 굳세어 

 

성균관 진사시험 이후로는 구지부례한 벼슬 따위를 마다하고 중국천하[中國天下]를 장유[壯遊]하였고 4남은[四男]은 삼양[三陽]이니 과거에 올라 정언[正言]으로 계림[鷄林]고을로 출사하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고 오남[五男]은 계양[啓陽]이니 진사시험[進士試驗]에 장원[壯元]급제하여 정포은[鄭圃隱]과 더불어 동년에 급제하여 관직이 문하부사비서감[門下府事秘書監]이고 6남은[六男]은 재양이니 장사랑[將仕郞]으로 관직이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이르니세상에서 칭 하기를 육남대가라 이르렀다. 남녀 손자들이 불어나 번성[繁盛]하여 모두다 기록하지 못하노라.

목은 이색[牧隱李穡] 4자의 등과를 축하하여 이르기를 형제 연중[兄弟聯中]이라 함은 지금 세상이 다같이 알고 있는 바는 밀성박씨에 왈 密陽.왈 大陽.왈 三陽.왈 啓陽 이라 일컬었다.

 

공의 부인은 四자등과로서 해마다 나라의 봉록을 받으니 당세의 모든 현인들이 그 복[福]됨을 칭송하지 않는이가 없었다.

공이 지평[持平]으로서 부모[父母]상[喪]을 당하여 복주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할 때 예절로 행함이 감[堪]히 근신하니 한 시대의 고관 선비들이 그 효성을 칭송하지 않음이 없었다.38인의 이름높은 선비중에서 목은[牧隱]과 더불어 도의를 사귀었다.

 

공의 사람됨을 성품이 강직함과 온순함을 겸비하여 의젓하고 엄숙한 가운데도 화평[和平]의 자질이 있으니 바라봄에는 엄숙한 모양이나 직접대하면 온화하다.그 가정에 있을 때는 작은일에 개의치 아니하고 그 가정에 있을 때는 경세제민[經世齊民]을 자기의 임무로하니 주역[周易]에서 이르는 바 왕신으로 충성을 다 하는 모양은 가히 절조[節操]에 부합된다고 이르리라.

공은 1298년 무술[戊戌]에 출생하여 1372년 임자[壬子] 8월 20일에 별세하니 수산현 귀명동에 장례를 치렀다.

슬프도다 공은 나의 선군정당문학공[先君政堂文學公]과 더불어 김 문정공과 같은 사위로 들었고 공의 부인과 나의 선비[先비]와 더불어 동모형제[同母兄弟]이니라 .공의 충효도의[忠孝道義]에 내가 일찍 감화[感化]된지 오래 되었는지라 공의 가문에 성대함과 위[位]가 인신의 의리에 지극[至極]함에 있음을 약술[略述]하여 여기에 덕행의 기국[器局]이 있음을 이르노라.

            

 안원숭[安元崇] [順興君 文惠公]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