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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뿌리/밀성 박씨

[스크랩] 밀성(양)박씨 관향조 밀성대군 휘언침 행록

梅谷 2007. 6. 24. 12:03

박언침은 신라 시조왕의 30세 손이다.
경명왕 승영[昇英]의 자[子]로 밀성대군이 되었다. 대군부에있는 이궁대 풍류현 세루정 [離宮臺 風流峴 洗陋亭]은 신라왕 들이 거동하여 놀던 곳이다.대군은 경명왕의 맏아들인 고[故]로 이 고을로 피봉[被封]된 것이다. 이궁대[離宮臺]는 본래 신라의 어진 사람들이 백성[百姓]을 덕화[德化]함으로 동경[東京]이 태평성사[太平盛事]에 저젓으니 이궁대 풍류현 세루정 의 이름이 당시[當時]의 풍속[風俗]과 민요에 나온것이다.
양촌권근[陽村權近]이 본조유사[本朝遺事]를 기록할 때 대군[大君]의 유적[遺跡]이라 하였다.
대군이 밀성[密城]으로 피봉[被封]된후 자손이 살은지 천년에 지파가 번연[繁衍]하고 세상[世上]에서 이름난 재상[宰上]과 선비[선비]가 많이 탄생하였다. 또 일국[一國]의 거족[擧族]이 되었다.대군의 아우 칠인과 같이 피봉된 사실은 신라사기에 실려서 천년 뒤에도 형제간[兄弟間]동근[同根]의 의[義]가 밝고깊다. 비로서 종족[宗族]들이 의논[議論]을 합[合]하여 신라선원보[新羅璿源譜]를 간행하여 대군[大君]의 소목[昭穆]을 차례로 밝혔다.
1922년에 팔도성손[八道姓孫]들이 순의하여 원덕사[遠德祠]를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에 세우고 대군의 후예[後裔]인 모든 중조[中祖]들을 배양 하였다.그후 乙丑에 단[壇]을 밀양 영남루 언덕에 모으고 또 그후 2년뒤 丁丑년에 제단을 밀양 무안리에 모으고 삼한벽공도대장군 휘 郁과 요동독포사 휘 瀾을 아울러 3대조를 제사하니 이곳을 경덕제 만운각 유경[景德齊萬雲閣유敬]이라고 한다.

공의 아버지는 신라 54대 왕이신 경명왕[景明王]이시다.이름은 휘정영[鼎英]이다.
후량[後梁] 말제[末帝] 정명[貞明] 3년 정축[丁丑]에 즉위 하셨다. 후당[後唐] 장종[莊宗] 동광[同光] 2년 갑신[甲申]에 훙서 하시니 재위 8년이었다.
능은 국도의  남쪽 15리 지점에 배일산[拜日山]묘좌[卯坐]이다.
왕비는 석씨로 모두 9명의 아들을 두셨다.능은 서화산[西火山] 자좌[子坐]이니 이 사실이 역사책과 가보에 수록되어 있다.

조부는 신라 53대왕이신 신덕왕[神德王]이시다.이름은 휘경휘[景暉]이고 시조왕의 27세 손이며 아달라왕의 23세 손이다. 후량[後梁] 태조[太祖] 건화[乾化] 2년 하[夏] 4월에 효공왕이 훙서하시자 왕으로 즉위 하셨는데 이를 일러 박씨가 왕위를 다시 전하게 되었다. 하고 노래 하면서 왕에게 알현하는 자들이 모두 돌아 왔다. 지금 우리 박씨들은 아달라 왕의 원손 [遠孫]들이니 시조왕이 쌓아둔 경사스런 일들이  이곳에서 가히 검증이 된다.
신덕왕 원년 임신[壬申]에 아버지를 선성왕[宣聖王]으로 추존 하였다.왕비는 정화태후[貞和太后]이다.
후량[後梁] 정명[貞明] 3년 정축[丁丑] 추[秋] 7월에 훙서 하시니 재위 6년이시다. 왕비 김씨는 효공왕의 따님이다. 능은 영산[靈山]의 자좌[子坐]로 역사와 가보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공의 아들은 휘욱[郁]으로 고려태조[高麗太祖] 때 삼한벽공도 대장군 [三韓壁控都大將軍]을 지냈다.신라[新羅]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지가 오래지 않으니 진무공신[鎭撫功臣]로 삼한벽상공신[三漢壁上功臣] 또 삼한삼중대광[三韓三重大匡]이라 하겠다. "충렬왕 34년[1308]에 삼중대광이라고 하던 것을 충선왕때 벽상[壁上]삼한[三漢]을 덧붙여 만든것으로 뒤에 몇차례 개칭 하였다." 부인은 변한국부인 신씨[弁韓國夫人 申氏]로 그 부친은 고려 태사 개국공신에 장절공이신 대장군 신숭겸[申崇謙]이다.《文獻 高麗史考》
 

출처 : 밀성박씨충헌공파동호공종친회
글쓴이 : 박지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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