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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불세출의 '大政客' 강감찬

梅谷 2009. 3. 1. 11:43

불세출의 '大政客' 강감찬

문과 장원급제한 전형적인 문신
귀주대첩후 영웅됐지만 공직서 물러나
'장군'칭호, 그의 다양한 면모 덮을 수도

이한우

 

고려 초인 1018년(현종9년) 거란의 제3차 침입을 좌절시켜 고려 최고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쇠가죽으로 강물을 막아 거둔 승리가 아니다. 더욱이 '강감찬 장군 강감찬 장군' 하는 데 강감찬은 무신(武臣)이 아니라 문신(文臣)이다. 그것도 문과 장원급제 출신의 전형적인 문신이다.

강감찬(姜邯贊 948년~1031년)은 지금의 서울 봉천동(당시 시흥군)에서 태어났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의 탄생과정은 예수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송나라 사신이 한양을 방문하던 중에 시흥군 쪽으로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집을 찾아갔더니 그 집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훗날 강감찬이 재상이 되었을 때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더니 소스라치게 뒤로 물러서며 "문곡성(文曲星)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 있구나!"라고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고대 중국에서 별 점을 칠 때 문곡성은 큰 인물의 탄생을 알리는 별로 전해진다. 그러나 '고려사'는 그의 용모에 대해 "체격이 작고 용모가 보잘 것 없었다"고 적고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이기도 했던 아버지 강궁진으로부터 학문과 무예를 익힌 강감찬은 남들보다 늦은 고려 성종2년(983년)인 36살 때 문과에 장원급제해 탄탄대로를 달려 거란의 2차 침입이 있던 1010년 현종1년 예부시랑으로 있었다. 예부는 조선의 예조에 해당하며 시랑은 참판(차관) 내지 참의(차관보)의 고위직이었다.

993년(고려성종12년) 거란의 1차 침입은 서희의 탁월한 외교술로 거란병을 되돌렸지만 거란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강조(康兆)를 단죄한다는 명분으로 침략한 제2차 거란 침입 때 조정 관리들은 하나같이 현종에게 항복을 건의했다. 이 때 유일하게 항복을 반대한 인물이 예부시랑 강감찬이었다. "적의 예봉을 피했다가 천천히 회복할 방도를 강구해야 합니다."

현종은 결국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라도로 몽진했고 얼마 후 국권을 다시 회복됐다. 현종은 무한한 총애로 강감찬의 지략에 보답했다. 훗날(현종9년) 현종이 강감찬을 서경유수(평양시장)로 제수하면서 내린 임명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경술년(1010년)에 오랑캐의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이 침입한 전란이 있었다. 그때 만약 강(姜)공의 전략을 채용하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오랑캐 옷(左��)을 입을 뻔했다." 그는 전장의 장수가 아니라 불세출의 전략가였다.

이후 강감찬은 이조판서에 해당하는 이부상서에 오른다. 문신의 인사권을 다루는 핵심요직이었다. 1018년 거란이 10만의 병력을 보내 세 번째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자 현종이 강감찬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거란군 침입 소식을 접한 현종은 강감찬을 최고사령관인 상원수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20만8300명의 병력을 인솔케 했다. 압록강 쪽으로 나아간 고려군은 흥화진 인근 대천(大川)에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물을 막은 다음 거란군이 대천을 건너려 할 때 1만2000여명의 기병이 돌격해 거란군의 기세를 꺾어버렸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귀주대첩은 해가 바뀌어 거란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이다. 도주하는 거란군에 맞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대항했으나 승부를 보지 못한 채 대치상태가 오래 가고 있었다. "때마침 갑자기 비바람이 남녘으로부터 휩쓸려와서 깃발이 북으로 나부껴 고려군이 이 기세를 타고 맹렬히 공격해 거란군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란군 병사 중에서 살아돌아간 이는 수천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10만 가까운 거란병사가 한반도에 들어와 다 죽었다는 말이다.

강감찬은 고려 최고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조선 때도 강감찬은 마치 우리가 이순신을 기리듯이 최고의 충신으로 받들었다. 삼군을 거느리고 개선하는 상원수 강감찬을 현종은 교외까지 친히 나가 맞이했다.

여기서부터 강감찬의 행보는 눈길을 끈다. 개경으로 돌아온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현종은 만류했고 강감찬은 거듭 사의를 밝혀 마침내 1년후인 현종11년 공직에서 물러난다. 물론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030년 잠시나마 문하시중(조선의 영의정)을 맡기는 하지만 그는 사실상 10년 동안 야인(野人)으로 살았다.

아마 나라를 구한 영웅이 계속 조정에 남아 있었다면 어떤 명목으로 비명횡사(非命橫死)를 당했을지 모른다. 강감찬은 대전략가임과 동시에 정치의 본질을 꿰뚫어보았던 대정객(大政客)이기도 했던 것이다. 자칫 '강감찬 장군'은 이런 강감찬의 다양한 면모를 덮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