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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스크랩] 이성계의 사돈 지윤이 간신으로 기록된 이유

梅谷 2009. 8. 23. 09:44

병졸 출신으로 재상에까지 올라 이성계가 중앙 진출 위해 사돈 맺어후손들이 왕권다툼서 패해 폄하돼

고려 공민왕과 우왕 때의 군인이자 정치가인 지윤(池奫·?~1377)은 병졸 출신으로 재상인 문하 찬성사에까지 오른 말 그대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고려사'는 그에 관해 대단히 부정적이다.

일단 그를 '간신(姦臣)'으로 분류했다. 출신이나 출세에 대해서도 "그의 어머니는 무당", "사졸 출신으로 누차 종군하여 군공(軍功)이 있었다"며 간략하게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우왕 때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이인임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대정객(大政客)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언급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적이다. 첫째, 공민왕 때 신돈이 사형을 당하자 숭경부 판사로 있던 지윤은 신돈의 의복과 장식품 등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둘째, 판도사 판사로 있을 때 강을성이란 자가 판도사에 금을 바치고 대금을 받기로 돼 있었는데 그 사이에 중죄에 걸려 사형을 당했다. 그러자 지윤은 강을성의 처를 자기 첩으로 삼은 다음 금값으로 포목 1500필을 받아챙겼다.

셋째, 신순이라는 재상이 사형을 당하자 지윤은 아들 지익겸을 신순의 딸에게 장가들인 다음 몰수당했던 신순의 집과 재산을 되찾아 아들에게 주었다.

넷째, 지윤은 우왕의 유모 장씨와 간통했고 그의 처도 장씨와 가까워 수시로 궁중을 출입하며 전횡을 일삼았다.

다섯째, 찬성사에 오른 지윤은 30명이나 되는 첩을 거느렸는데 오로지 부자만을 취하였고 미모(色)는 문제삼지 않았다.

'고려사'의 이 같은 기록만 놓고 보면 지윤은 탐욕스럽고 음탕하며 부정부패와 악행만을 일삼은 인물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임금에 대한 충신 반역과는 거리가 먼 사안들이다. 그가 그나마 '반역'편에 실리지 않고 '간신'편에 실린 것도 실은 역모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고려사가 지윤을 '간신'으로 분류한 이유를 따져본다면 최종적으로 주목할 만한 게 이인임과 권력을 다투다가 패배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신하들끼리 권력투쟁을 하다가 패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흔한 일이다. 그런데 왜 지윤은 이처럼 세종 때 편찬한 '고려사' 편찬자들로부터 심하다 싶을 만큼 가혹한 평가를 받은 것일까?

어쩌면 그 실마리는 이성계의 장남 진안대군 이방우(李芳雨·1354~1393)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방우는 조선 건국 이듬해인 1393년 12월 '술병'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성계의 왕위를 잇게 될 '0순위' 후보였다.

야사에는 이방우가 아버지의 조선건국을 끝까지 반대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죽었을 때 실록은 굳이 "진안군은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날마다 많이 마시는 것으로써 일을 삼더니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졸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또한 어쩌면 죽은 자에 대한 모독으로 읽힐 수 있는 졸기(卒記)다.

지윤은 바로 이 이방우의 장인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중앙권력으로 진출하기 위해 자신들의 결혼을 활용했던 이성계가 자신의 장남의 혼처로 꼽은 집안이 바로 지윤의 집안이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무신 출신의 이성계는 출신이 한미해 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른 지윤을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집안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윤은 정치투쟁에서 패해 세상을 떠났고 사위 이방우 또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한편 왕자의 난 이후 이성계의 둘째아들 이방과(李芳果·정종)가 사실상의 장남이라는 명분으로 떠밀려 왕위에 오른다. 흥미롭게도 이방과는 성빈 지씨와 숙의 지씨를 후궁으로 받아들이는데 둘은 자매 사이였다. 더 흥미로운 것은 두 지씨가 이방우 처의 친동생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정종은 형수의 두 여동생을 후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혼인형태는 고려의 유습이 그대로 남아 있던 조선 초기여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방우와 부인 지씨 사이에는 봉녕군 이복근이 있었고 정종과 성빈 지씨 사이에는 덕천군과 도평군, 숙의 지씨 사이에는 의평군·선성군·임성군 등의 아들이 있었다. 정종의 경우 정안왕후 김씨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언급된 모든 군들이 다 왕위계승 가능자들이었다.

그러나 결국 왕위는 권력의지가 강했던 이방원에게 돌아갔고 그 뒤를 이은 아들 세종은 아버지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방우나 정종 등의 비중을 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지윤은 이중 삼중으로 부정적 해석의 희생물이 되는 액운(厄運)을 당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가 바로 '고려사'에서 간신(姦臣)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출처 : 밀성박씨충헌공파동호공종친회
글쓴이 : 매곡 박지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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