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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대왕 탄강 사실 본문

나의뿌리/신라 박씨

시조대왕 탄강 사실

梅谷 2010. 4. 3. 09:39

시조(始祖) 임금께서 탄강(誕降)하신 사실
박씨의 선조(先祖)는 신라(新羅)에서 나왔으니 시조(始祖)는 혁거세(赫居世)이시다. 이보다 앞서서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동쪽 바닷가에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어서 각각 촌장(村長)이 있고 아직 君長은 없었다. 한(漢) 나라 선제(宣帝) 시대 1년 임자(壬子)년에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모두 알천(閼川)에 모여서 하나님께 <군장이 있기를> 빌었다. 그때에 중국 황실(皇室)에 딸이 한분 있었는데(성은 유(劉)씨이고 이름은 바소(婆蘇)임) 신선(神仙)의 방술(方術)을 얻었기에 남편이 없으면서 아이를 가졌다. 그래서 사람들의 의심을 받기에 바다를 건너 해동(海東)에 와서 서악(西岳) 仙桃山에 숨어 살았다. 여섯 촌장들이 하나님께 군장 얻기를 기도한지 三일이 지났을 적에 그 여자가 양산(楊山) 나정(蘿井)에 내려와서 오색(五色)의 구름 가운데서 시조(朴赫居世)를 탄생하시어 아직 포(胞)를 가르지 아니하였는데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그곳을 바라보니 나정의 숲 사이에 용마(龍馬)가 크게 울부짖으며 신선들이 꿇어 엎드려서 절하는 모양이 있었다. 이에 고허촌(高墟村)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그곳에 가서 보니 큰 포(胞)가 알(卵) 만하고 박(瓢)) 만한 것이 있었다. 그 포를 가르니 거기에서 시조(박혁거세)가 탄생하셨기에 해산(解産)바라지로 동천(東川)에 목욕시키니 그 몸에서 광채(光彩)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두 경하(慶賀)하여 춤을 추었다. 여섯 마을의 사람들이 시조의 탄생이 이처럼 신이(神異)하기 때문에 여섯 마을의 사람들이 박으로써 성을 하고 혁거세(赫居世)로써 이름을 하였으니, 「박」을 성으로 한 것은 진한 사람들이 박(瓢)을 박(朴)이라고 말한 것에 연유하고 「혁거세」를 이름한 것은 시조의 몸에 밝은 광채가 나서 온 세상을 밝게 비춘다는 뜻이었다.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받들어 길러서 나이 7세가 됨에 의젓하기 큰 사람이 되었다. 어느날 꿈에 신인(神人)이 시조에게 황금 자(金尺)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 자(尺)로써 금구(金: 온세계)를 바르게 하십시오” 하였는데 그 꿈을 깨고 보니 황금자가 손에 들려 있었다. 시조가 이 황금자로써 몸에 대어주면 죽은 자는 살아나고 병든 자는 병이 나았기에 사람들이 시조에게 말하기를 “신기한 덕이 있다”고 하여서 한(漢) 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연호) 1년 갑자(甲子)년에 임금의 지위에 올라 「거서간(居西干:임금)」이라 하였으며, 나라의 이름을 「서라(徐羅)」라고 불렀다(뒤에「신라(新羅)」라고 고쳐 불렀다). 시조의 비(妃)는 탄생하셨을 적에 용(龍)이 알영(閼英) 우물에 나타나서 오른쪽 옆구리로 시조의 비를 탄생하였는데 어떤 늙은 할멈이 받들어 길렀다. 그래서 시조의 비가 탄생한 알영우물의 이름을 따서「알영」이라고 이름하였으며, 장성한 뒤에 시조의 비가 되었으니 그분의 탄생이 또한 신기하다 하겠다. 안(按)하여 보건데 시조 박혁거세는 서악 선도산의 성모(聖母)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러기에 중국 사람들의 이를 찬양한 것에「선도산의 성모가 현인(賢人)을 배어나서 나라를 창조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경주(慶州)의 서악 선도산에는 예부터 성모의 사당(祠堂)이 있어서 이제까지 잘 중수(重修)하여 잘 수호(守護)하고 있다.
▶ 신라시조대왕기(삼국유사)
朴氏之先 出於新羅始祖赫居世而先是朝鮮遊民 分居東海濱山谷間 爲六村 박씨의 선조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에서 시작되었는데 신라가 이룩되기 전에 고조선의 유민들이 동해 해변이나 산골에 흩어져 살아서 육촌을 이루었고 육촌에는 각각 촌장이 있었다.

一曰閼川楊山村(今蕓岩寺) 其長 謁平, 二曰 突山高墟村 (今南山部) 其長 蘇伐都利, 三曰茂山大樹村(今長福)其長 俱禮, 四曰山珍支村 其長 智伯瓠, 五曰金山加利村(今加德) 其長 祗, 六曰明活山高耶村(今臨川) 其長 虎珍, 是爲辰韓六部長(或云六祖自天而降) 첫째촌은 알천가의 양산촌인데 촌장은 (李)알평이고 둘째촌은 돌산기슭의 고허촌인데 촌장은 (崔)소벌도리이며 셋째촌은 무산기슭의 대수촌인데 촌장은 (孫)구례요 넷째촌은 자산기슭의 진지촌인데 촌장은 (鄭)지백호이고 다섯째촌은 금산기슭의 가리촌인데 촌장은 (裵)지타요 여섯째 촌은 명활산 기슭의 고야촌인데 촌장은 (薛)호진이니 이를 진한 육부장 또는 하늘에서 내려온 여섯조상이라고도 한다.

其時 悶無君長 六村長 俱會閼川 三日齊沐 禱于天 檀紀二二六五年 壬子 高墟村長蘇伐公 望楊山蘿井(現南七里)傍林間五色雲中 有馬大斯而如仙人拜之狀 卽往觀之 馬忽不見(或云龍馬爲始祖王所乘) 只有一胞 如卵如瓠 그때 육촌을 통솔할 임금이 없음을 걱정한 끝에 육촌장이 閼川에 모여서 사흘동안 목욕재개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더니 단군기원 2265년(서기전69,한무제 지절 원년 임자)에 고허촌장 蘇伐都利가 멀리 양산을 바라보니 그 밑의 蘿井근처 숲사이에 오색이 영롱한 서기가 뻗치고 용마가 큰 소리를 지르며 신선이 꿇어 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이는지라 즉시 쫓아가 보니 용마는 보이지 않고 한 胞가 있는데 큰 알 같기도 하고 박 같기도 하였다.

解胞卽始祖誕生 儀形 端美 奉浴于東川 新生光彩 鳥獸率舞 六村人 以其神異 養之 辰人之語 謂瓠爲朴故 以朴爲姓 取赫赫然居當世之義 以赫居世三字 爲韓 소벌공이 신기하게 여겨 포를 깨어 본즉 사내아기(곧 시조왕)가 태어나니 풍채가 단정하고 아름다운지라 동천에 목욕시켜드리니 온 몸에 광채가 나고 가까이 있던 새와 짐승들이 신인의 탄생을 축복하여 노래하고 춤을 추기로 육촌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받들어 길렀다. 진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瓠(표주박)에 朴(박)이라 부르는 고로 박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박으로 성을 삼고 혁혁한 광명을 이 세상에 주시며 오래오래 살아 주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赫居世라 이름 지었다 한다.

十三 岐夙成 六部人 推尊之 立爲君 檀紀二二七七年 甲子也 居西干(辰人稱王之語或云呼貴人之稱) 國號 徐羅 其後 改國號曰新羅(神字 德業一新 羅字 網羅四方之義)열세살에 키가 어른과 같이 숙성하시므로 육촌 사람들이 받들어서 임금으로 모시었으니 이때가 바로 단기2277년(서기 전57년, 한선제 오봉원년) 甲子 사월 丙辰일이었다. 왕호를 居西干(그때의 말로 존귀함을 뜻함)이라 하고 나라이름을 徐羅라고 하였다가 그 후에 新羅라고 고쳤다(新은 德業日新이요 羅는 網羅四方이라는 뜻임).

始祖王 乃聖母所誕也 故 中國人讚 有仙桃聖母娠賢O邦之語 慶州西岳仙桃山 舊有聖母祠而至今重修守護. 朱子曰無人道而生 或者以爲不祥 先儒 피疑之而 張子云天地之始 固未始先有人也卽人固有化而生者矣 盖天地之氣生之也 상고해 본즉 시조왕은 곧 성모가 낳으신 분이라 그런고로 중국문헌에 선도산의 성모가 현인을 낳아 나라를 창립했다는 말이 있고 주자가 말하기를 사람에 의하여 태어나지 않음을 혹자는 상서롭지 않다하여 선유들이 많이 의심했지만 장자가 이르되 천지가 "개벽한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다가 후에 사람이 생겼으니 이는 곧 천지의 기운으로 생긴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했고

蘇氏曰 凡物之異於常物者 其取天地之氣常多故 其生也或異 麒麟之生 異於犬羊 蛟龍之生 異於魚龜 物固有然者矣 況神人之生 異於凡人 何足재哉 斯言 德之矣 소씨는 말하되 "대체로 보통과 다른 물건은 천지기운으로 되는 일이 많음에 까닭이 있고 그 까닭이 다르기에 기린의 출생이 개나 양과는 다르고 교룡의 출생이 어별과는 다른 법인즉 하물며 신인의 탄생이 범인과 다른 것은 아무것도 괴이할 바가 아니라" 했으니 이 말이 둘다 이치에 맞는 것이다.

楊山蘿井 有始祖王誕降碑閣而重修守護 양산 나정에 이 사실을 기록한 <시조왕 탄강 비각이 있어 이를 중수하여 지금까지 수호하고 있다. > 牧隱李穡詩 云鷄林天瓠爲朴蔓延扶疎何赫赫 明太朝高皇帝命題新羅詩 云伊昔赫居世開國五鳳年相傅千載久粗保一隅偏목은 이색의 시에 "계림의 하늘아래 표주박에서 태어난 박씨들이 뻗어나고 퍼져서 어찌나 혁혁한 지고" 라 하였고 명나라 태조고황제가 "신라"라는 명제를 내려 시를 짓되 "옛날에 혁거세가 한나라 오봉원년에 나라를 창건하여 천년을 내려오며 동쪽 한 지방을 지켜오고 있다"라고 하였다.

나정과 알영정
알영 왕비 신화(삼국유사)
權近始祖王妃之生也 亦有瑞應 初 龍見於閼英亭 右협生女兒 有老 異而育之 名以井名 及長 有令德 爲王妃 能內輔 治國基 國人 謂之二聖시조왕비의 탄생도 역시 보통과는 달라 용이 알영정 우물가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니 동네의 안노인이 신기하게 여겨 양육하고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지었더니 자라서 훌륭한 덕을 갖추시고 왕비가 되시어 시조왕을 잘 보필하시며 나라의 기초를 든든히 세우시니 백성들이 이성이라 불렀다.

權近曰國家之興 莫不有內助之美 夏有塗山 商有有 周有太 所以正始而基化者 其至矣 閼英 爲始祖之妃 國人 稱美之 必有德 有以服人之心矣.권 근이 말하되 국가가 흥할 때는 반드시 내조의 미가 있기 마련이어서 하나라에는 도산이 있었고 상나라에는 유신이 있었고 주나라에는 태사가 있어서 나라의 시초를 바로잡고 교화의 기초를 튼튼히 한 연유가 되었다. 알영씨가 시조왕비의 자리에 앉게 되심을 신라사람들이 찬미함은 그 높으신 덕이 국민들을 설복시킨 까닭이라 하겠다.

謹按 天降神聖 必配聖妃 理固然也 閼英氏 生於龍歸於王 亦天意之不尋常也 周文王 得太 時人 有好述之詠 始祖王 得閼英 國人 有二聖之稱 夫所謂萬化之基 百福之源 果不在玆歟 삼가 생각건데 하늘이 신성을 내리실 때 반드시 성비를 배필로 내리심은 이치에 당연한 일인지라 閼英씨가 용에서 탄생하여 始祖王과 짝짓게 된 일도 하느님의 뜻이 심상치 않음이니 주나라 문왕이 태사를 얻어서 그때 사람들이 시전의 관저장과 같은 노래를 불러 찬양했고 始祖王께서 閼英씨를 얻음으로 국인이 二聖이라고 칭송하였으니 萬物和育의 기본과 만복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是故 詩有葛斯 本支百世之美而我始祖後裔 亦莫不繁衍綿連者 此내聖妃之正化於始 貽福於後而固以必休於周矣그런고로 시전에 칡덩굴처럼 뻗어나고 메뚜기처럼 퍼저나서 본손과 지손이 백대의 아름다움을 이루었다고 하는 말과 같이 우리 시조왕의 자손이 길이길이 번창해가는 것도 역시 시조왕비 할머니의 성덕으로 기초를 바로잡아 복을 후세에 내리심이 주나라의 태사에 필적하다 하겠다
시조왕기(始祖王紀)
시조왕의 성은 박씨요 휘는 혁거세 혹은 부구내(弗矩內)라 하니 빛나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시니 왕위에 계신지 61년이요 수는 73세시다.능은 국도의 남쪽 담암사 북편 남정 숲안의 묘좌(卯坐)이고 왕비의 능도 같은곳 같은 좌향이다.

원년 갑자 오봉원년 4월 병진(丙辰)에 왕위에 오르시니 그때 나이 13세이다.거서간(居西干) 혹은 거슬감이라 하니 진한의 말에 귀인의 존칭이다. 국호(國號)는 서라벌이라 한다.

신라의 처음에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서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 서야벌(徐耶伐) 서벌(徐伐) 서울(徐蔚) 서라벌(徐羅伐)이라고 불렀는데 탈해왕 때에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기림(基臨)은 신라로 고쳤는데 지증왕때 와서 여러 신하들이 말씀 올리기를 시조왕께서 건국하신 이래로 나라이름이 정해지지 않아서 혹은 사라, 사로, 신라라고 부르니 신(臣)등은 생각컨데 신(新)은 날로 새롭다는 뜻이옵고 나(羅)는 사방을 한곳에 합한다는 뜻이오니 이것으로 국호를 정함이 마땅한 줄 압니다. 또 말하기를 “옛부터 나라가 있으면 다 황제 또는 왕이라 불렀는데 지금 건국한지 22세에 다만 방언으로 호칭하고 존호를 올리기를 신라국왕이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왕께서 이 말에 따르시다. 또 건국 이래로 왕이 돌아가셔도 시호가 없어서 모두 왕의 이름으로 호를 삼았으니 이제 왕이 돌아가시매 지증왕이라고 시호 하니 동국의 법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5년 무진(戊辰)(前漢甘露元年 B.C 53年)에 용이 알영정(오릉안에 있음)에 나타나서 오른편 갈빗대 밑에서 여아를 낳았으니 어느 늙은 할머니가 거둬 길러서 우물 이름으로 알영이라 이름 하였더니 장성하여 용모가 덕성스러워 시조께서 이를 들으시고 왕비로 삼으시니 극히 현숙하여 내조를 잘 하시니 사람들이 이성(二聖)이라고 말하였다.

권근(權近) 양촌(陽村)이 말하기를 국가가 흉할 때에 내조의 아름다음이 있나니 처음을 바로잡아 덕화를 베푼 것이 지극하다. 알영이 시조왕의 비(妃)가 되매 백성들이 칭송하였으니 반듯이 덕이 높아서 백성의 마음을 감복시켰기 때문이다.

삼가 상고하건데 주(周)의 문왕이 태사를 왕비로 맞이하매 시인(詩人)이 군자의 좋은 짝이라고 찬미(讚美) 하였고 우리 시조왕 께서 알영을 맞이하므로 백성들이 이성(二聖)이라 불렀으니 이른 바 만화(萬化)의 근본이요 백복(百福)의 근원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시경(詩經)에 갈담(葛覃) 종사(종斯)의 아름다움이 있어서 복손과 지손(支孫)이 백세에 번영한 것이니 우리 시조왕의 후손이 또한 길이 번창하게 된 것이 성비(聖妃) 알영씨 께서 처음부터 덕화를 펴서 후손에서 복을 주신 것이 주나라의 태사와 함께 짝 할 만 하다.

권양촌근(權陽村近)이 말하기를 업적을 살피는 것은 임금으로서 할 일이다. 옛날에는 봄철에 경작(耕作)하는 것을 살펴서 부족(不足)함을 도와주고 가을에는 수학(收穫)하는 것을 살펴보고 넉넉치 못한 것을 도우나니 한번 놀고 한번 즐기는 것이 모두 백성을 위하지 않음이 없다. 이제 시조왕이 육부를 순시하여 농상을 권장함은 옛 임금이 지방을 순행(巡行)하여 보조(補助)하는 법에 가까우나 부인은 외부일이 없으니 규문(閨門)을 나가지 않는 것인데 왕비가 따라서 순행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삼가 상고하건데 백성들이 농사하지 않으면 굶주릴 것이고 양잠 하지 않으면 헐벗을 것이니 농상을 장려함은 나라의 제일 요긴한 일이다. 어찌 어진임금이 위에 있으면서 백성으로 하여금 굶주리고 헐벗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주공(周公)은 농사일이 괴롭고 어려움을 말씀하셨고 주례(周禮)에는 왕비가 친히 양잠하는 일이 실려 있으니 이것은 임금 된 자로 백성의 괴로운 일을 고루 알아서 인도하고 거느리게 하는 바 이다. 우리 시조께서 친히 순시하여 농사를 권장하심은 정히 임금의 인정으로서 몸으로 친히 어루만지시고 정성으로 권하고 독려(督勵)하신 것이니 어찌 후세의 임금들이 권장하는 이름뿐이고 백성이 굶주리고 헐벗음을 보살피지 않는 것과 견줄 수 있겠는가 왕비께서 수행했다는 것은 잘 알 수 는 없으나 양잠은 왕비에게 관계되는 일이므로 동네의 부녀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유리왕 때에 왕녀로 하여금 부내(府內)의 여자를 이끌고 길쌈 솜씨를 시험한 일이 있으니 성비의 유풍이 훌륭한 바라 하겠다.

19년 임오(壬午) B.C 39년 변한이 경남지방(弁韓 : 慶南地方)에 와서 황복하다.

21년 갑신(甲申)에 경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이름 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데 옛날이 군주가 덕을 닦고 인정을 베푸는 것을 먼저 삼고 성곽과 궁실을 짓는 일은 오히려 그 다음 일이므로 옛날에 흙을 둘러서 성을 쌓으되 그 성이 한길이 넘지 않았으며 요(堯)임금은 초가(草家)집에 살면서도 만방(萬方)이 마음을 합해 화목했으며 우(禹)임금은 궁실(宮室)을 낮게 하고 천하를 위해 지극한 덕을 베푸시매 백성들이 높은 덕을 형용(形容)할 수 없었다. 우리 시조께서 왕위에 오르신지 21년에 경성을 쌓고 26년에 궁실을 지으셨으니 그 어찌 덕정을 앞세우기 위해서 성곽과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덕화가 행해지고 풍속(風俗)이 아름다워지며 은혜가 흡족해지고 백성이 화목해진 뒤에 성곽과 궁실을 짓되 성은 반드시 흙으로 쌓고 궁실은 반드시 낮게 지었으니 후세의 임금들이 백성을 괴롭히고 재력을 낭비하여 긴 성과 높은 집을 지어서 사치하고 장려함을 자랑하는 것과는 판이할 것이고 그 성을 쌓고 궁실을 지을 때도 반드시 모든 백성들이 자기일 처럼 즐겁게 협력 하였을 것이니 후세에 임금들은 이것을 본받을 만한 일이다.

30년 계사(癸巳)에 낙랑(樂浪)인이 침입하여 국경까지 왔다가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들판에 노적가리가 있는 것을 보고 “도의(道義)를 지키는 나라이니 가히 침범할 수 없다.”하고 곧 철병(撤兵)하여 돌아가니라.

53년 병진(丙辰)에 동옥저(東沃沮)가 사신을 보내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말하기를 과군(寡君)이 남한에 성인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드립니다 하였다.

60년 계해(癸亥)에 두 마리의 용이 금성에 우물속에 나타났는데 폭우가 쏟아지고 궁성의 남문이 낙뇌하다. 익년(翌年) 3월에 왕께서 훙서(薨逝)하시고 칠일을 지내 알영왕비께서 이어서 훙(薨)하시니 태자 남해(南解)께서 왕위에 오르니 몸이 장대하고 성품이 침중(沈重)하고 후덕(厚德)하며 지혜가 많으시다. 시조왕을 국도 남쪽 칠리인 당암사 옆 남정 숲안에 묘좌에 장사하고 왕비도 같은 곳에 장사하다. 7월에 낙랑군이 침입해서 나라를 버리시고 덕이 없는 내가 잘못 왕위에 오르매 이웃나라가 침입해 왔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라고 하시니 근신(近臣)이 말하기를 “적병이 우리의 국상을 다행삼아 감히 쳐들어온 것이오니 하늘이 반드시 도우지 않으시리다.”하였더니 적병이 과연 물러가다.

삼가 상고 하건데 성덕을 지닌 임금님이 왕위에 계시니 사방으로 오랑케가 모두 복종(服從)하고 신기(神奇)한 보화가 저절로 이르는 것이므로 옛날에 성왕(聖王)은 사람을 복종시키려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복종하게되고 귀이한 보화를 구하려 하지 않아도 보화가 저절로 오게되나니 삼묘씨(三苗氏)가 스스로 와서 항복하였고 도산(塗山)의 모임에 찬하의 제후가 옥백을 받들어 내조 하였고 월상씨(越裳氏)가 흰꿩을 곡물로 바친 것이 그 증험이다. 옛적에 우리 시조왕께서 덕을 닦아 나라를 다스림에 왜인(倭人)이 군사를 돌리고 변한이 즐겨 항복해 낙랑이 군사를 철회 시키고 옥저가 말을 바치고 신인이 금척을 올렸으니 이것이 어찌 힘으로 구할 수 있겠는가 하우씨(夏禹氏)와 주공(周公)의 덕이 없고서는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러므로 60년의 왕위에 계신동안 무기를 사용함이 없어 백성들은 전쟁을 알지 못하고 태고 때에 즐겁고 평화로운 세월에 삶을 누리게 한 것이 후세에는 볼 수 없는 태평성대을 이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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