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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 집단의 남하과정 (서라벌-서울-경주) 본문

나의뿌리/신라 박씨

박혁거세 집단의 남하과정 (서라벌-서울-경주)

梅谷 2013. 7. 11. 13:37

아래글은 박혁거세님의 신라가 처음부터 지금의 경주일대에서 건국되었다거나,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알(卵)에서 태어났다는것이 아니고, 북방의 북중국,몽골일대의 동호(東湖)계열의 종족인 오환족(烏丸族)의 한 지파(支派)가 박씨집단(朴氏集團)이었으며, 그 박씨집단은 혁거세님의 아버지대에 북방(북중국일대)에서 한반도로 남하하여 지금의 서울(서라벌)에서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BC57년경 건국되었다가 100여년후인 AD 60년경 서울-청주-경북상주-경주로 남하하여 정착했다는 글이다.

 

필자(김성호)는 삼국사기 혁거세조부터 신라본기 초기에 나오는 기록이 처음부터 경주에 있었다면 도저히 맞지 않고, 서울과 충북보은, 청주,경북상주, 경주로 이동한 동태적(動態的)인 이동과정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박씨집단과 그 종족집단은 북방에서 남하하여 지금의 서울(서라벌)에서 건국하고 이후 오늘날 남한 지역일대로 흩어져 갔다는것인데, 밀양, 함양,상주, 충주, 반남(전남나주)박씨등은 이들 오환계 박씨집단의 지파들 혹은 무리들이 흩어져 나중에 남하했던 세력으로 서라벌(사로국)을 건국한 박씨 혁거세의 후손임을 자처한것이라고 해석한다.

신라하대 경명왕의 9명의 아들이 오늘날의 밀양박씨, 고령박씨, 함양박씨,순천박씨등이 아니고, 남하해 한반도에 정착한 오환족무리(박씨집단과 동일종족무리들)집단이 남한지역 각지역에 산거하면서 고려시대에 본관(本貫)제도에 따라, 밀양에 정착한 박씨(혹은 오환족의 거수계 씨족)는 밀양박씨가 되고, 경북고령에 정착한 무리는 고령박씨, 충북충주에 정착한 무리는 충주박씨(忠州朴氏), 전남 나주에 정착한 무리는 반남박씨(潘南朴氏), 경북상주에 정착한 무리는 후일 상주박씨(商州朴氏)가 된것으로 본다.

필자(김성호)는 북방민족인 오환족으로 박씨집단을 추정하는 언어학적,제도적,문화적 근거(根據)를 제시하고 있으며, 박씨집단의 이동과정을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해 제시하고 있다.


박혁거세님의 출자(出自:어디서 나왔는가 come from )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학자들의 주장도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만주지방과 몽고 사이를 중국의 황하(黃河)라는 큰강이 시작되는 곳(황하 상류)에 동호족(東胡族)이라는 고대 민족이 있었습니다.

이들 동호족은 만주지방에 주거하는 부여(扶餘)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한 일파였습니다. 황하의 상류, 즉 음산산맥[陰山山脈]으로부터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현지말로 "실라[新羅]"라 부르는데

이 강변의 넓은 초원지대를 무대로 살아가는 동호족(東胡族)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내몽고지방에서는 현지어로 황하(黃河)일대 지역을 "실라(SILLA)"라고 부른답니다.



"실라(SILLA)"는 현지어로 "새로운 땅"이라고 합니다.

실라를 한자어로 옮긴것이 신라(新羅)인것입니다. 우리말을 한자어를 빌려(차용,借用)할때 우리 발음을 한자식으로 옮기니 황하 상류 지역의 실라가 "신라(新羅)"가 된것입니다.

황하일대의 드넓은 초원(草原)지대에서 주로 목축(牧畜)과 사냥을 하며 살던 동호족(東胡族)이 이 황하를 사이에 두고 공존하던 흉노족과 큰 전쟁을 벌여 크게 패하게 됩니다.

동호족은 전통적인 기마족으로 철따라 푸른 초원을 찾아 이동하며 살았는데, 때마침 같은 기마족의 또 다른 집단이 훈(흉노-匈奴)족들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훈족(흉노족)의 최전성기로서 그들의 영웅 모돌(冒頓) 대선우(大單于)가 전 훈족을 통일하고 중국의 한(漢)나라마저 복속시킨 후, 북방의 초원을 걸고 동호족과 결전을 벌였습니다.

이 숙명의 싸움에서 크게 패한 동호족이 둘로 쪼개어져 그 한 파는 선비산(鮮卑山) 쪽으로 근거지를 옮겨 선비족(鮮卑族)이 되고, 다른 한파는 오환산(烏丸山)으로 근거지를 옮겨 오환족(烏丸族)이라 하였습니다. 서기전 87년, 오환족의 주력이 잃어버린 초원을 탈환하기 위하여 큰 싸움을 벌였으나,

또 다시 훈족(흉노족)의 막강한 힘에 패하면서 3명의 칸(汗)과 6천명의 병사를 잃고 말았답니다. 이때 흉노족에게 패하고 흩어진 오환족의 한 일파(무리)가 동남(東南)쪽으로 새로운 정착지를 ?O아 내려오다 내몽고-만주-한반도 북부를 거쳐 지금의 서울 한강이북지역에 들어 옵니다.

오늘날 몽고의 학자들은 신라의 건국시조인 박혁거세를 몽고지역에 살고 있던 흉노족이나 오환족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기원전(B.C) 87년 흉노(凶奴)와 오환(烏丸)이 사생결단의 대결전을 벌였으며 이 싸움의 여파로 인해 상당수의 부족집단이 대거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들중의 한 지파(支派)가 박혁거세 집단이었고 한반도로 남하(南下)하여 지금의 서울에 둥지를 틀었다고 봅니다.

이때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건국 연도인 기원전 57년. 즉.중국 한後漢나라 연호인 오봉吳鳳 어간시기라는 얘깁니다. 당시의 서울지역에는 신라외에 마한과 온조의 십제(十濟)도 둥지를 틀고 있었던 만큼 가히 초기 삼국시대의 심장부라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이 수도를 뜻하는‘서벌’이란 명칭으로 불렸음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박혁거세 집단이 비류백제 세력에 밀려 계속 남하하면서 경북 상주지방과 의성을 거쳐 지금의 경주로 내려간 시기가 5대 파사왕때로 서기 101년이었다고 봅니다. 경북 상주(尙州)의 옛이름이‘사벌’이며 경북 의성은 ‘소부리’, 경주는‘서벌’이다.

 

 

유명한 신라향가 중에‘처용가(處容歌)’를 보면 “서벌 밝은 달에 밤새도록 놀다가...”란 구절이 있음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뿐 아니라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부여의 옛이름도‘소부리’란 걸 봐서도 수도를 뜻하는 서울이란 이름은 삼국시대 초기부터 쓰여졌고 그 기원은 한강유역의 서울, 즉 지금의 대한민국 수도 서울임은 명명백백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시는 지금부터 약 2000 여년전으로 한반도는 만주와 북중국 일대가 전란(戰亂)등의 정치적 격변기(激變期)여서 북쪽 즉 북중국과 만주일대에서 전쟁과 같은 혼란을 피해서 또는 내부적 사정등으로 새로운 정착지를

?O아 많은 수의 씨족(氏族)집단들이 한반도로 이주(移住)해오던 시기 였습니다. 이들 북쪽에서 내려온 집단(무리)들은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먼저 와서 정착해 있던 세력들과 연합하기도 혹은 전쟁을 치르면서 정착해 나갔던 것입니다.

또 한반도 남부로 내로온 이주세력과 이러한 이주세력에 밀린 세력중 일부는 다시 바다 건너 지금의 일본까지 건너갑니다. (야요이 문명 전파) 이 오환족(烏丸族) 무리를 내몽고 지방 황하(黃河)강 상류지역(실라지역)에서 왔다고 하여

"실라족(新羅族)"이라 부르고 지도자는 우거수(右渠帥) 호공(弧公)이었는데, 이들 오환족(실라족)은 처음엔 당시 한강부터 지금의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 산재해 있던 마한제국(馬韓諸國)에 복속하고 차츰 정착하기 시작합니다.

이 오환족(실라족)의 일부가 한반도 한강변에 정착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만주의 오환족들이 몰려들면서 인구(人口)도 늘어나고 세력도 강해져 갑니다.

B.C 57년, 그 동안 부족을 이끌던 우거수[右渠師] 호공이 죽자 그의 아들 불구래[弗矩內]가 겨우 13살의 어린 나이로 수두[소도,蘚塗]에 나아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커서칸[居西汗]의 위에 오르니 이 이가 바로 실라[新羅]의 시조로 알려진 밝혁거세[朴赫居世]입니다.

이후 마한(馬韓)에 조공하며 힘을 기르던 서라벌은 마한에 조공을 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키워 지금의 경기도 한강 일대를 중심으로 만주지방의 부여에서 이주 해와 역시 한강 인근에 정착한 온조(溫祚)의 십제(十濟)와 다툼을 합니다.

아시다시피 온조는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과 소서노(小西奴)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인데, 고주몽은 소서노 이전의 예씨(禮氏)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유리왕자를 후계자로 삼자,

고주몽의 둘째부인인 소서노는 온조와 이전 남편에게서 난 비류(沸流) 두왕자를 데리고 일단을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온조는 오늘날 서울 송파구 일대에 십제(十濟)를 세우고, 그 배다른 형 비류는 삼국사기 기록(미추홀,인천으로 갔다가 땅이 짜고 척박해서 정착치 못하고 자살하자 비류무리가 온조에게가서 정착했다)과 달리,

지금의 충남 아산만으로 가서 목지국(目支國)이라는 오늘날 경기,충청,전라 지역에 있던 여러 마한(馬韓)제국중 하나부터 정복해서 웅진에 도읍을 정하고 강력한 해상국가로 거듭난 비류백제(구태백제)였습니다.

이후 온조의 십제(十濟)의 후원국인 충남 공주지방을 중심으로 경기,충청지방의 마한(馬韓)을 정복한 역시 부여계(扶餘系)의 "비류백제(구태백제)"와 경쟁하다,

밝빛이세[朴赫居世]가 새라불[서라벌,徐羅伐]을 건국한지 117년 만에 새라불의 제3대 노례(弩禮,유리) 이사금(尼師今)은 군사들을 정비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며 새로운 정착지를 향하여 피곤한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서울일대를 버리고 다시 남하(南下)하여 오늘날의 경주(慶州)일대에 최종 정착(定着)합니다.

오늘날 우리지명인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바로 내몽고와 만주 ,한반도 북부를 경유해온 동호족의 일파인 오환족(烏丸族,실라족)의 지도자 우거수 호공(弧公)과 그 아들인 혁거세가 건국한 "새라불(서라벌,徐羅伐)"이 변모하여 오늘날의 "서울"이 되었다고 합니다.

동호족의 일파인 오환족(실라족)의 수장(首長) 자리인 "거서간(居西干)"은 북방 몽고,만주일대의 북방 유목민의 최고 지도자 명칭(名稱)입니다. 간(干)은 칸(khan)으로서 몽고부족을 통일하고 역시 몽골족의 최고 지도자가된 테무진이 "칭기스칸"이라고 칭한것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즉 본래 지금의 내몽고-북만주 일대의 기마(騎馬)민족에서 출발하여 한반도 북부-서울부근-경상도 경주 의 이동로(移動路)를 거쳐 온것입니다. 박(朴)이라고 성(姓)을 붙인것도 "밝다"라는 우리말을 한자어를 차용(借用)하여 표기했다고 합니다.

박혁거세(朴赫居世) : 밝고(박,朴)밝은(혁,赫) 빛이 이 세상(世)에 있다(거주,居住) 고대 한민족의 하나인 내몽고와 북만주에 살던 동호족(東胡族) -> 내몽고 오환산(烏丸山)일대 거주하는 오환족 -> 오환족중 즉 지금의 황하(黃河)강 상류의 "실라"지역출신인 실라족(실라를 한자로 표기,新羅) -> 박씨족(朴氏族)

 

일찍이 김상 교수님이 “B.C 2 ~ A.D1세기는 민족의 대 이동기(『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 이하『네티즌 고대사』)”이며 “서라벌국의 원주지는 북만주나 바이칼호 동쪽의 몽고초원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하셨는데, 그 때 그분이 “선비족과 오환족이 왕을 가사, 거세, 거수 등으로 불렀다(『네티즌 고대사』)”는 사실을 바탕으로 박혁거세 “거서간”의 이름도 이들의 왕명이라는 주장을 덧붙이셨죠.

이는 고(故) 김원룡 교수님이『한국문화의 원류』에서 신라를 건국한 이가 북방 기마민족 출신이었다고 추론하시고 박 혁거세의 탄생설화에 말[馬]이 등장한다는 점과 신라 귀족들이 반드시 말을 탔던 것을 보더라도, 신라 건국자가 북방 기마족과 관계 있음을 반영하는 것 같다고 주장하신 점이나, 김성호 박사님이 박씨족의 상주도읍 때 고타군주가 파사왕에게 헌상한 ‘청우(:푸른 소)’가 바로 박씨왕가에 출가한 최초의 김씨왕비 사성부인을 은유한 말이며 이것이 바로 박씨족의 시조신화로서, 이것은 비단 박씨족에 한한 것이 아니라 거란족이던 요국(遼國)의 시조신화도 바로 이와 같다고 지적하신 점,

최초의 박씨 왕 때에는 왕비의 국구(왕비의 아버지)만을 갈문왕으로 추봉하여 거란족의 국구장제와 동일하며, 박씨족과 거란족은 시조신화뿐만 아니라 국구장제까지 일치하여 동족이었음이 확실하다는 연구결과와 비슷해 주목되는데, 저는 언어와 역사기록을 바탕으로 살펴보았을 때 그분들의 견해가 옳다고 여겨 제 주장을 그분들의 논지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전개하려고 합니다.

주지하다시피 거란은 퉁구스(:동호)인 계통인데, 홍기문 선생이 인용한 정인보 선생의 견해를 따르면 신라의 관명 아찬(阿粲)은 곧 동호어(東胡語)의 형(兄)이라는 아간(阿干)과 같은 말(홍기문 선생의 책인『洪起文 朝鮮文化論選集』에서)이며

『거란국지(契丹國志)』세시잡기(歲時雜記) 속에 3월 3일날 거란인들은 나무로 새긴 토끼를 과녁으로 삼고 편을 갈라서 활쏘기를 내기하면서 그날을 도리화(淘裏化)라고 부르는데, 도리(淘裏)는 토끼라는 말이요, 화(化)는 활이라는 말이라고 한 대문이 있고(『삼국지』진한 조와『삼국유사』진한 조를 따르면, 진한인들은 활을 ‘호’라고 불러 거란어와 비슷함을 알 수 있음. ‘활’은 진한인의 말인 ‘호’가 바뀐 말로 보인다),

홍기문 선생이 인용한 시라토리(鳥居) 박사의 여행기에는 동몽고 일대(거란 - 키타이 - 족이 살았던 곳)에서 고적(古蹟)을 ‘신라인의 자취’라고 부르고 있다는 구절이 나와 이들과 서나벌 왕족이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또한 중국 사서에 따르면 선비족은 동생을 ‘아우’라고 부른다는 구절이 나와, 선비족의 말이 신라인의 말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퉁구스계로 알려진 민족 가운데 오환족과 신라의 풍습이 비슷하다는 점은 이런 가설을 뒷받침하죠.

한 인간집단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제사의식이나 장례식에서 오환족과 - 신라인의 문화를 이어받은 - 한국/조선(:이북)의 그것이 비슷한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환(烏桓)의 장례의식에는 한국의 자리걷이(씻김군)과 유사한 습속이 보이고(박원길의 책『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마니즘』에서. 이하『초원제국의 샤마니즘』), 음식을 먹기 전에 일정량을 떼어 하늘과 땅 및 조상에게 바치는 행위(고수레)가 오환족에게서도 나타나며(『초원제국의 샤마니즘』에서),

한국/조선 사람은 장례식 때 죽은 사람의 물건을 태우는데, 오환족에게서도 물품을 태우는 ‘툴레시(Tuleshi)’라는 습속(박원길 연구원의 말에 따르면, 툴레시는 순장과 더불어 북방민족의 대표적인 풍습 가운데 하나라고 함)이 발견되기 때문에, 오환족과 우리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단 말이죠.

게다가 박 연구원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오환족의 거주지는 적산인데, 적산(赤山)이라는 명칭은 고대 한국의 불거내 ․ 불함산이나 고대 몽골의 보르킨산(Burkhan Khaldun)과 의미가 매우 유사하다는 데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 오환의 적산은 “붉은 빛을 내는 산”이라는 점에서 어원적으로 불함산이나 Burkhan Khaldun과 큰 차이가 없다고 간주할 수 있으므로(『초원제국의 샤마니즘』에서), 저는 종래 한국학계가 막연하게 ‘북방 유이민’이라고 불러온 서나벌 건국세력의 정체가 오환족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것입니다.

또한『삼국지』「오환전」에는

“문자가 없고, 나무에(부호를) 새겨 신표로 삼은 뒤 읍락(邑落)마다 (그것을) 전한다(刻木爲信, 邑落傳行, 無文字).”.

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은 그로부터 3세기 뒤의 신라 상황을 전하는『양서(梁書)』「신라전」에 나오는

“(신라는)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 (부호를) 새기고 그것을 신표로 삼았다”.

는 구절과 비슷하여 관심을 끕니다. 오환족은 서기 207년 오환의 기마군단을 탐낸 조조가 20여만명에 이르는 오환의 부중을 중국의 내지로 이주시켜 군호(軍戶)와 편호(編戶)로 흡수함으로서 역사상에서 사라져 갔고, 신라의 풍습은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뒤에야 중국 남부에 알려졌는데 어떻게 이렇게 비슷할 수 있을까요?

이는 신라가 고구려/백제를 뛰어넘어 몽골초원 동남부에 살던 오환족과 만났거나, 아니면 오환족이 어떤 시기에서건 신라에 들어와 자신들의 풍습을 남겼다고 추리할 때에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 기록과 고고학 유물로 미루어보았을 때 전자일 가능성은 별로 없으므로, 저는 후자를 골라 오환족이 서기 207년 이전에 경상북도로 내려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게다가『삼국지』「오환전」에는 오환족이 각 마을 하나하나를 ‘부(部)’로 불렀다(數百千落自爲一部)고 적혀 있는데, 이 기록은 그동안 ‘후대에 조작된 기록’으로 알려진『삼국사기』「신라본기」유리이사금 조(條)의 기록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단 말입니다.

「신라본기」는 서기 32년 유리이사금이 혁거세가 정복한 6촌(村)의 이름을 각각 양<부>, 사량<부>, 점량<부>, 본피<부>, 한기<부>, 습비<부>로 바꾸었다고 적어 오환족이 마을(:村) 하나하나를 부(部)로 불렀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죠.

혁거세의 후손인 유리이사금을 오환족 출신으로 볼 경우, 유리이사금 조의 기록은 지배자인 유리이사금이 피지배자인 6촌을 오환족의 풍습대로 뜯어고친 사실을 적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한국/조선의 역사학자들이 거의 살펴보지 않은『삼국지』「오환전」의 기록이 혁거세의 출자와 서나벌 왕실의 출신을 간접적으로 설명해준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Read : 42, IP : 211.253.60.49
- 2004/01/21 Wed 22:54:06에 올림 → 2004/01/30 Fri 11:55:22


#이 글을 읽은 一道安士 님의 답글 :

Re: 신라초기 유리왕의 부 체제

조약돌님 말씀:

"게다가『삼국지』「오환전」에는 오환족이 각 마을 하나하나를 ‘부(部)’로 불렀다(數百千落自爲一部)고 적혀 있는데, 이 기록은 그동안 ‘후대에 조작된 기록’으로 알려진『삼국사기』「신라본기」유리이사금 조(條)의 기록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단 말입니다.

「신라본기」는 서기 32년 유리이사금이 혁거세가 정복한 6촌(村)의 이름을 각각 양<부>, 사량<부>, 점량<부>, 본피<부>, 한기<부>, 습비<부>로 바꾸었다고 적어 오환족이 마을(:村) 하나하나를 부(部)로 불렀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죠.

혁거세의 후손인 유리이사금을 오환족 출신으로 볼 경우, 유리이사금 조의 기록은 지배자인 유리이사금이 피지배자인 6촌을 오환족의 풍습대로 뜯어고친 사실을 적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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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중요한 기록입니다. 이제 유리왕조의 부 체제 확립이 이해가 됩니다. 이 신라의 부 체제란 것이 본래 북방유목민족의 풍습으로 훗날 여진족의 부 체제나 비슷한 준 군사조직의 성격을 지닌 통치조직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박씨왕족이 오환족이라면, 그들이 왜 고향을 떠났는지를 설명해야 하는데요,『삼국지』「오환전」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기록을 읽어봅시다.

“그들의 선조가 흉노에게 격파당한 뒤, 많은 (오환족) 사람들이 다른 세력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했고 그 스스로도 힘이 없어서 흉노의 신하가 돼 복종했다. (오환은 흉노에게) 세세토록 소와 말과 양을 보내야 했으며, 만약 (보내는) 시한을 넘겼는데도 흉노가 요구하는 만큼의 마릿수를 채우지 못하면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을 (흉노의) 종으로 보내야 했다.

오환은 흉노의 일연제(壹衍鞮) 선우가 다스리던 때에 이르러 사나워졌고, (흉노족한테) 장차 모돈(冒頓)이 누운 곳이 박살난 사실을 퍼뜨려 치욕을 안겨주려고 흉노 선우의 무덤을 파헤쳤는데, 일연제 선우가 (그 사실을 알고) 몹시 화를 내며 기병 2만명을 내 오환을 쳤다.

대장군 곽광(藿光)은 (소식을) 듣자 도요장군(渡遼將軍) 범명우(范明友)를 보내 그가 기병 3만명을 데리고 요동(군)을 나가 흉노를 치게 했으나, 흉노는 명우를 따르는 군사가 (싸움터에)이르렀을 때 이미 (군사를) 이끌고 떠난지 오래였다.

오환은 그들이 무너진 틈을 타 진격해 마침내 6천여 명의 목을 베고, 세 왕(王)의 머리를 얻어서 돌아간 흉노병(兵)을 피해 또다시 달아나야 했으며, 나중에 몇몇이 다시 변방을 노략질하자 명우가 (오환족 패잔병을) 여러 번 쳐부수었다.”

―『삼국지』「오환전」

(:오환족이 ‘왕(王)’이라고 불리는 지도자들을 여러 명 두었다는 기록도 신라의 갈문왕 제도와 거란족의 국구장제가 오환족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려줍니다. 서라벌과 거란은 비슷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기에 비슷한 제도를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한(漢)나라의 장군 곽광이 살아 있을 때인 서기전 78년(곽광은 서기전 87년에 대장군이 되었고 서기전 68년에 죽었으므로,「오환전」의 기사는 서기전 87년에서 68년 사이에 일어났다고 짚어볼 수 있음. 혁거세왕이 태어난 해가 서기전 69년이므로 그 시기를 서기전 87년에서 서기전 69년 사이라고 생각했다),

동호족의 후손인 오환족은 동호를 무너뜨린 흉노에게 복수하려고 싸움을 걸었다가 오히려 지고 쫓겨났는데, 이후 그들은 한나라의 국경지대로 쳐들어왔다가 한군(漢軍)에게 가로막혀 갈 곳이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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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 :

동한(:후한) 사람인 반고(班固)가 지은『한서(漢書)』에는 “원봉(元鳳) 3년(B.C. 78) 1월 태산(泰山) 지역의 내무산(萊蕪山) 남쪽 흉흉(匈匈)에 수천명의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가보니, 큰돌이 스스로 섰는데, 높이가 1장(丈) 5자(尺)이고 크기가 48위(圍)이며, 땅속 깊이 8자(尺)에 돌 세개가 다리를 하여 세워져 있다. 돌이 세워진 곳에는 흰 까마귀(白烏)들이 수천마리 몰려있었다(孝昭元鳳三年正月 泰山萊蕪山南匈匈 有數千人聲 民視之 有大石自立 高丈五尺 大四十八圍 入地深八尺 三石爲足 石立處 有白烏數千集其旁 [:漢書 卷27 五行志]).”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자신들과는 겉모습과 언어(言語)가 전혀 다른 부족이 이상하고 신비스러운 석조물을 만들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邊 光 賢,「고인돌에 대한 기록(記錄)」,『고인돌과 거석문화 - 동아시아 - 』, 도서출판 미리내, 서기 2000년, 302 ~ 303쪽)”되며

“여기서 말하는 ‘흰가마귀(白烏)’는 겉이 하얀 가마귀가 있을 수 없듯이, 단순하게 가마귀(烏)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흰옷을 입고있는 가마귀와 관련된 부족(部族)을 약간 비유(比喩)하여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흰가마귀(白烏)는 곧 연(燕) 나라의 북쪽에 근거(根據)하고 있었다는 오환족(烏桓族, 東胡)의 유민(遺民)을 비하(卑下)하거나 비유(比喩)하여 말한 것으로, 오환족(烏桓, 烏丸)은 동호족(東胡族)과 흉노족(匈奴族)의 한 갈래이며, 사새(四塞) 안에서 볼 때 야만족이므로 멸시(蔑視)하는 의미에서 이같이 쓰지 않았나 생각된다(변광현, 같은 책).”

“또한 여기서 말하는 흉흉(匈匈)이라는 지명(地名)은 태산(泰山)의 동쪽에 있는 내무산(萊蕪山) 남쪽 기슭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 산동반도(山東半島) 제남(濟南)의 동남쪽에 위치한다(변광현, 같은 책).”

당시 전한의 영토였던 산동반도 제남의 동남쪽에 난데없이 오환족이 수천 명이나 나타나 거석 구조물을 세운 사실로 미루어볼 때, 오환족은 서기전 78년 이전이나 또는 그 해에 흉노족에게 쫓겨서 한나라로 침투한 듯하며 서기전 78년은 곽광이 대장군으로 일하던 때이므로『삼국지』「오환전」의 사건이 일어난 해가 서기전 78년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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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족은 신(新)나라 왕망과 사이가 나빠져 중국에 자주 쳐들어갔고(『삼국지』「오환전」), 후한 초기에는 고구려 ․ 예 ․ 맥 ․ 선비(鮮卑)족과 함께 후한(後漢)에 쳐들어가기도 했으므로(『후한서』「고구려전」과『삼국사기』「고구려본기」) 그들은 흉노족이 자신들을 짓밟은 다음에도 살아 남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한데, 유목민족의 특성상 싸움에 지면 순순히 무릎꿇기보다 다른 곳을 찾아 달아나는 경우가 많으니만큼(예컨대 흉노족이 한과의 싸움에서 지자 서쪽으로 달아나 훈족이 된 사실이나, 여진족에 깨진 거란족이 중앙아시아로 달아나 ‘카라 키타이[:서요西遼]’왕국을 세운 사실이 좋은 예임)

이 무렵 많은 오환족이 본거지인 흥안령(興安嶺. 몽골초원과 만주를 나누는 산맥임)에서 요하(遼河) 상류인 노합하(老哈河. 라오허) 유역까지 펼쳐진 초원지대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달아났다고 짚어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난민들은 전쟁이 터진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법이므로, 몽골초원(:흉노의 땅)이나 화북평원(:전한[前漢] 땅)이 아닌 몽골초원의 동남쪽으로 갔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는데, 이곳에는 요령성과 흑룡강성, 길림성이 있으며 한/조선 반도도 있으므로 이들의 이동과 서나벌의 건국이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어요.

(박씨족이 오환족일 수도 있다는 가설은 김성호 박사님이 서기 1982년『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에서 들고 나오신 학설이며, 제 창작물이 아님을 밝힙니다. 비록 박사님이 최근에는 그 가설을 철회하고 박씨족을 스키타이족과 연결지어 생각하시지만, 저는 그분과는 달리 박씨족이 오환족일 것이라고 믿는다는 사실도 덧붙입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서나벌이 세워지기 전, 오환족의 왕족이었을 박혁거세의 아버지가 “조선의 유민(『삼국사기』「신라본기」)”인 6촌 사람들과 만난 시기는 오환족이 학살당한 지 10년 뒤인 서기전 69년(「신라본기」에는 혁거세가 서기전 57년, 열세 살 때 즉위했다고 적혀있는데 그렇다면 혁거세의 탄생 시기 - 서나벌 왕족이 내려온 시기 - 는 57 + 12 = 69 여서 서기전 69년이라는 계산이 나옴)입니다.

그리고 6촌 사람들은 몽골초원의 동남쪽인 경기도에 살고 있었죠(천관우/김성호/일도안사설). 그로부터 13년 뒤인 서기전 57년에 서나벌이 세워지며, 이들은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데로 북아시아 유목민의 신화인 천손 신화와, 남아시아 농경민의 신화인 난생 신화가 접목된(김병모 박사의 학설) 혁거세 탄생 설화를 지닌 채 역사에 나타납니다.

이들은 당연히 흉노에 대한 반감과 한(漢)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을 것이며, 그 사실은 경주 금척리 고분군에 전해지는 이야기에서도 드러나고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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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건국되고 박혁거세 거서간이 열 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첫 임금이 되었는데,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려고 언제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느 날 어린 임금이 대궐 뜰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웬 사람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한 뒤 사라졌다.

"저는 천제(天帝)의 사자입니다. 천제께서 지금 '지상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이루어졌는데 새 나라를 축복하기 위해 이 금척(金尺. 황금 자)을 선물로 갖다 드려라.'고 하셔서 가지고 왔습니다. 이 금자는 앓는 사람을 재면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을 재면 다시 살아나는 보물입니다. 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은 하늘에 절하고 금자를 받아들어 신하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다음 창고에 소중하게 보관하도록 하였다.

박혁거세 거서간과 알영 왕비는 백성을 어질게 다스렸으므로 나라 안이 화목하고 농사도 잘 되어 태평세월이 계속되었다. 임금도 백성들도 '이것은 하늘이 축복해준 금자의 덕'인 줄로 알고 금자를 소중히 여겼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던 한(漢)나라 왕이 신라에 금자라는 보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금자를 잠깐 보고 줄 테니 빌려 달라."고 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린 임금은 신하들을 불러 "금자를 빌려 주는 것이 좋겠소, 안 빌려 주는 편이 좋겠소?"라고 물었다.

한 신하가 나와서 아뢰었다.

"한(漢) 나라는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 교만한 나라입니다. 금자를 빌려주면 우리 신라를 업신여겨 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신하가 아뢰었다.

"한(漢) 나라는 자기네 나라가 부강한 것을 믿고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만일에 그러한 보물을 한나라가 가진다면 이웃 작은 나라들을 더욱 괴롭힐 것입니다. 금자를 보내서는 아니되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중한 보물이라 하더라도 잠깐만 보고 주겠다는데 그것도 못한다면 어찌 이웃간의 의리가 서겠소, 못 주겠다는 구실이 뚜렷해야 하지 않겠소?"

"그 금자를 땅 속에 묻어버리는 편이 좋을 듯 하옵니다. 사람의 목숨이란 한도가 있는데 죽어야 할 사람을 그러한 보물로써 자꾸만 살려 놓는다면 마지막에는 나라 안에 사람이 차고 넘쳐 새로 세상에 태어날 자손들이 크게 위협받을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보물을 가져 공연히 힘센 나라의 욕심을 자극해 침략받을 염려도 없지 않으니 땅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 상책인가 하옵니다."

왕은 그 의견을 옳게 여겨 금자를 땅에 묻어 무덤을 만들었다. 신하들은 다시 임금에게 아뢰었다.

"한(漢)나라는 넓고 큰 나라입니다. 만일 금자를 땅에 묻었다는 기미를 알게 되면 곧 파내어 가지고 갈 것입니다. 금자무덤 주위에 더 많은 무덤을 만들어서 어느 무덤속에 금자가 들어있는지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은 이를 허락했다. 그 뒤 한나라 사신이 와서 금자를 빌려 달라고 했다. 왕은

"이웃나라께서 금자를 잠깐 빌려 달라하시니 어찌 못한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금자가 너무 귀중한 보물이라서 땅 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래도 도적들이 훔쳐갈까 두려워서 그 주위에 더 많은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금자를 묻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지금은 금자가 어느 무덤에 들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렵게 먼 길을 오셨는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금자를 보여주지 못하는 까닭을 설명했다.

한(漢)나라 사신은 "있는 무덤을 모두 파보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하며 "금자를 묻은 무덤으로 안내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한의 사신은 금자를 묻은 무덤 주위에 너무 많은 무덤이 있어서 파보는 일을 단념하고 돌아가야 했다.

그날 이후 무덤 속에 금자를 묻은 사람이 정말 죽었으므로 신라에서도 금자가 들어있는 무덤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도 금자는 금척리 고분군 가운데 어느 한 무덤에 묻혀 있으리라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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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우선 "박혁거세" 거서간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적고 있고 신라의 보물을 탐내는 '이웃'이 한(漢) 나라라고 전하는데, 이는 혁거세왕이 한대(漢代)인 서기전 57년에 즉위하였다는 역사서의 구절과 일치하므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만든 가능성이 큽니다.

한나라는 22년 전 오환족이 학살당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오환족 족장의 아들이 새 나라를 세우고 진(辰)을 몰아낸 사실을 안 뒤 새 나라가 한(漢)을 위협할 만큼 힘이 센지를 알려고 사신을 보냈겠죠.

박씨족은 22년 전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기 때문에 한(漢)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신하가 된 "조선의 유민"(:6부)들도 53년전 ― 한漢의 신하이자 연나라 사람이었던 ― 위만이 세운 나라에서 달아나 진(辰)에 망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그리고 위만조선이나 한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어떤 나라와도 왕래하지 않을 정도로 한漢을 미워했으므로) 왕족과 마찬가지로 한(漢)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금척리 전설에서도 신하들이 앞장서서 한나라를 "교만한 나라", "자기네 나라가 부강한 것을 믿고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는 나라라고 욕함. 또 혁거세왕이 한나라를 "이웃"이라고 부르는 사실은 서나벌이 한나라와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암시한다.

오환족은 한나라와 가까운 초원지대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한이 "이웃"나라였다. 만약 6촌 촌장이나 박혁거세가 경상북도의 토착세력이었다면 한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이웃 나라"로 느꼈을 까닭이 없고, 애초에 부딪히지 않으므로 반감을 품을 까닭이 없다)

서기전 57년, 북아시아(:시베리아와 몽골초원)/동아시아에서 이렇게 극심한 반한(反漢)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세력은 한나라와 대립하던 흉노나, 구성원이 한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흉노에게 학살당했으며 나중에 한으로 들어가는 것도 제지당한 오환족, 한때 위만조선에서 조선상(朝鮮相)이라는 벼슬을 지내다가 위우거(우거)와 대립해 고조선 사람들을 이끌고 "동쪽 진(辰) 나라"로 달아난 역계경의 후손밖에 없습니다(역계경의 이야기는『삼국지』「한전」이 인용한『위략』에 실려있음).

그러나 흉노는 - 중국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 나라를 유지하고 오환족을 쳐부술 정도로 강자였고, 따라서 달아나 새 나라를 세울 까닭이 없죠. 또 "조선의 유민"들은 한에 반감을 품긴 했어도 말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결국 말을 잘 기르면서 말을 상징으로 삼고 한나라에 대한 반감을 품을 수 있는 무리는 오환족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백(白)은 '서쪽'을 나타내는 빛깔이기도 합니다. 흰 말은 - 목격자인 “조선의 유민”이자 “6촌”의 주민들이 볼 때 - '서쪽에서 온, 말을 잘 다루고 말을 상징으로 삼은 무리'를 은유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그들은 6촌으로 오기 전에 흉노와 한에게 학살당해 살 곳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죠. 그래서 저는 박혁거세 거서간(불구내)이 오환족의 거수라는 가설을 세운 것입니다.

이 전설은 박씨들이 겪은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져 전해 내려오다가,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간 뒤 경주의 전설이 되어 전해 내려왔을 것입니다. 금척리 고분군의 전설은 ‘결과’이며「오환전」의 기록은 ‘원인’인 셈이죠.

결국 혁거세 거서간의 아버지는 서기전1세기 무렵 흉노와 싸워서 지고, 한(漢)에 쳐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한 오환족 난민들의 지도자이자 ‘거수’라고 불린 왕이며 살기 위해 경기도로 달아나 위만조선의 유민을 굴복시켜 동맹자이자 신하로 삼은 다음 새 나라를 세웠다는 가설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때 성씨를 ‘박’씨로 바꾸었을 것입니다.

박혁거세 -02 (김성호님의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참조)-to be continued

 

박혁거세 관련 두번째 기록으로 먼저 본 자료를 읽기 전에 01번 자료를 읽어보고 나야 명확한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한다.

본내용을 읽기 전에 두분(박영규님, 김성호님)의 주장의 차이점을 보면

ㅇ 박영규님은 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대륙에 있었다 라고 봤다.

ㅇ 박영규님은 삼한(마한, 변한, 진한)을 전통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위치에 정착되어 있는 것으로 봤으며 그중 진한은 연나라 망명인, 위만조선을 피해 고조선 준왕을 따라온 유민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봤다. 그러나 김성호님은 辰韓(燕나라의 漢族이 아니고 연나라 선주지에 살던 원주민으로 봄)의 위치가 계속 변동하면서 마지막 단계에서 정착하는 개념으로 보고 기술하고 있다.

ㅇ 즉, 김성호님은 진한이 한반도 남쪽 동해안으로 최종 정착하는 과정중에서 신라는 이미 개국되어 정착되어 가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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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08년 한무제의 침공으로 아래 그림에서 보듯, 위만조선,眞番, 辰國은 낙랑군에 흡수되고 그중 辰國 유민만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마한의 동계지에 京畿辰韓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한강 유역에는 한터마한과 경기진한이 존재 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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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님은 辰韓의 이동과정은 언급하지 않고 연나라 망명객 내지 고조선 유민들이 지금의 경주 일대에 정착해 있는 것으로 부터 시작을 했으나 김성호님은 辰韓의 이동경로를 추적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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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기록에 보면 신라는 고조선의 유민이 산곡에 분거했다 한다. 삼국사기에는 연나라로 부터 온 진한계 유민을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가정이 있을 것이다.

ㅇ 윗글에서 언급 하듯 서라벌을 현재의 서울로 보고 마한계 고조선 유민들이 섞여 있다는 뜻

ㅇ 서라벌을 현재의 경주로 보고 진한지역이지만 마한계가 섞여 있다는 뜻

ㅇ 김부식에 의해 기록 됐으므로 신라의 정통성을 고조선으로만 한정 했을 가능성

어떠했든 김성호님은 신라건국 부터 경주 월성 정착년(BC 57 ~ AD 101) 까지의 지명고를 통해 신라초기의 남하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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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표에서 BC 28년에 낙랑(지금의 평양)이 침략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김성호님은 신라의 건국지를 지금의 경주로 봐서는 평양에 있는 낙랑이 쳐들어 올 수 없다는 가정이다. 충분히 가정이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러나, 박영규님은 낙랑을 중국대륙에 있는 한무제가 개설한 낙랑군, 지금의 동해안에 있는 낙랑국, 2개의 낙랑으로 분류하였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낙랑은 지금의 동해에 있는 낙랑국으로 본 것이다.

두분의 차이점은 여기서 부터 출발한다. 박혁거세 01, 02 편을 기술하기전 먼저 이 문제에 심층 더 깊은 문헌을 봤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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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님은 한강 유역에 박혁거세 집단의 초기 신라가 있어 3개의 종족이 서울에서 터를 잡고 있었다고 본 것이다.

하나는 위만조선을 피해온 고조선계의 마한, 진시황의 노역을 피해온 연나라 원주민계의 진한, 박혁거세의 계의 3개의 종족국가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 후술 되겠지만 그럼 박혁거세계는 고조선계와 연나라 원주민계가 섞여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종족을 3개라고 할 순 없지 않을까 생각되나 김성호님은 박혁거세계를 다른 종족으로 보고 있다.

만일 김성호님의 주장을 택한다 한다면 서울은 신라의 수도였다는 것인데 정말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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