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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박씨 충헌공14세 동호공 박정원 행록 본문
동호공(東湖公) 휘 정원 행록
박정원의 자는 계선[季善]이며 호는 동호[東湖]이다. 선조(7년) 萬曆,甲戌 1574년 8월13일에 태어났다. 조선 정종의 사위로서 승사랑 문하사인 지돈령부사 밀령위 부마공(駙馬公) 휘 갱의 아들로 함길도 관찰사로 이시애의 란을 평정한 정란공신으로 병조참의에 오른 휘 서창이 그의 5대 조부이다. 조부는 일찍이 퇴계 문순공 이황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가정 병오 1546년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학행으로 창락도 찰방에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된 휘 관이며,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휘 문충 이시다.
기유[己酉]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로서 병진[丙辰]에 증광시[增廣試]문과 병과에 발탁되어 승정원 주서를 맡아보고 1616년에 함평현감, 종사관, 선전관, 흥양현감과 1624년에 호조정랑, 춘추관기주관, 평안도사[平安都事]와 풍기군수,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에 이르렀다. 병인[丙寅]년 8월 16일 돌아가셨다.
묘소는 여주군 대신면 하림리 병좌[丙坐]이며 표석.상석. 장군석.망주석이 있다. 시제일은 음력 10월 11일이다.
대제학[大提學]택당 이식[澤堂 李植]이 비갈을 찬하고 외증손인 영의정[領議政]수곡 이여[睡谷 李畬]가 기문을 추가 하였다. 문정공[文正公]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지[誌]를 찬하였다.
[前]부인은 숙부인[淑夫人]용인이씨[龍仁李氏]로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종운[從運]이며 조부는 문정랑[文正郞] 숙간[叔幹]이고 증조는 첨정[僉正]을 지낸 효완[孝完]이다.
[後]부인은 숙부인[淑夫人]안동권씨[安東權氏]로 아버지는 여산군수 주[澍]이며 조부는 진사 경룡[景龍], 증조는 칠사[七使]소[紹]이다. 맏이는 휘 만영으로 용인현령과 한성판관을 지내시고 통정대부에 증직되었고 둘째 휘천영은 통훈대부 장악원정을 지내시고 증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이다.
공이 함평현감[咸平縣監]으로 계실 때 흉도들이 일어나 폐모후 "즉 인목대비를 말한다]의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본읍에 모여 상소를 올리고자 할 때 공이 본읍에 군대를 발하여 이들을 내쫓고 본읍에 장보[章甫]들을 전부 구금하여 상소를 올리는데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왕이 바뀐 후 [인조반정] 청망[淸望]에 올랐으나 권정 받지는 못했다.
갑자년[甲子年]때 이괄[李适]의 난 때 순찰사와 병마사들이 모두 공의 뒤를 따르기를 청하자 공이 마침내 병사를 따라 그 군대 3000인을 거느리고 대가[大駕]를 호위하여 장차 남행하고자 할 때 밤이 깊어 하늘은 캄캄한데 황급히 강을 건너게되자 공이 군대에 엄히 명하여 땔감을 쌓아 불을 지르게 하여 군대의 길을 밝혔다.
또 계책으로 배를 얻어 따르는 신하들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하였다.이로 말미암아 호조정랑[戶曹正郞]으로 배수되고 이에 춘추관[春秋館]의 기주관[記注官]을 겸하여 영남의 조운[漕運]을 감독하게 되어 횡정[橫政]의 개혁하지 못한 것을 전부 없앴다.을측년[乙丑年]에 평안도사[平安都事]로 배수되고 구례[舊例]에 도사는 본도의 일에 [관찰사와] 더불어 하는 일이 없었으나 공이 이르자 관찰사가 공의 재주를 심히 아껴 모든 일이 비단과 삼베가 엉킨 것처럼 어지러운 일을 모두 공에게 속하게 하니 공이 즉시 해결하였다.병인서기 1626년에 임기가 만료되어 여주로 귀향하였다, 그해에 풍기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마침 발병하여 부임하지 못하고 여주의 전사[田舍]에서 돌아가셨다.
숙종[肅宗]을유[乙酉]에 상신[相臣]들이 함평의 일을 전달하자 임금이 말씀 하시기를 모[某]는 인륜이 곤두박질쳤을 때에도 기절이 가상하였으나 현용되지 못하고 죽었으니 대간직[臺諫職]으로 증직하여 대사간[大司諫]으로 추증되었다. 함평인들이 기산[箕山]에 서원(유애사)을 세워 매년 제사를 올렸다.
12대조 동호공 영정
동호공 묘소
정모재: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하림3리에 동호공 휘 정원과 좌우에 휘 만영 휘 천영 휘 하규 휘 상규 휘 현규 등의 위패를 봉안한 동호공파의 재실이며, 동호공의 휘 정자를 부쳐 정모재(鼎慕齋)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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