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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박씨 충헌공파 후 동호공 박정원 행장 본문

나의뿌리/동호공파

밀성박씨 충헌공파 후 동호공 박정원 행장

梅谷 2022. 1. 10. 16:47

동호공 영정

동호공 휘 정원 행장

공은 어릴 적에 병란(兵亂)을 만나 실학(失學)하시고, 성장(成長)한 뒤에 비로소 발분(發憤)으로 글을 읽으시어 기유(己酉. 1609)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하시고, 경술(庚戌. 1610)년에 목릉 참봉(穆陵參奉.)에 임명되셨으며, 갑인(甲寅. 1614)년에 광흥창(廣興倉) 봉사(奉事)에 승진하시자 바로 부임하시어 창고의 곡물 수량을 조사한바, 기록에 있는 것 수백 석(石)이 없어서 전관이 마땅히 죄가 있으므로 선군(先君)께서는 교승(交承)의 도리를 다치게 할까 두려워 상부에 보고하지 아니하고 한 해의 세미(歲米) 중 남는 것을 취하여 서리(胥吏)들이 이를 투절(偸竊)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 부족분을 충당하셨습니다. 병진(丙辰. 1616)년 봄에 문과 별시(別試)에서 뽑혀 승문원(承文院)에 권지(權知) 부정자(副正字)에 보직되셨고, 주서(注書)로 옮겨 천거되셨으나 미처 발령되기 전에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으로 승진되셨습니다. 아마도 대부인(大夫人)이 연로하시어 편안히 봉양하시고자 하는 뜻을 이루시고자 그 작은 뜻을 즉시 실행하시고 혼조(昏朝)한 때의 청요(淸要)를 피하여 정사(丁巳. 1617)년에 함평(咸平) 현감(縣監)에 발령을 받으셨습니다. 현민(縣民)이 사람을 사살(射殺)하였으나 그 살인자를 잡지 못하여 그 피살자의 아들이 그 화살을 가지고 와 고소하여 아뢰기를 아무아무개가 평상시 아비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자이니 그를 신문(訊問)하여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선군께서는 일부러 이를 들은 척도 아니하시고 그 화살만을 가지고 기다리시다가 며칠 뒤 사람을 풀어 그 의심이 가는 집을 에워싸고 수색하여 그가 간직하여둔 화살을 가져와 그 살인자의 화살과 견주어 보시니 같으므로 그 자를 신문하여 마침내 자복을 받아내셨습니다. 그 무렵 간신들이 국사를 전횡하여 흉론(凶論)이 번창하자 호남의 여러 유생(儒生)들 중 이들과 사귐을 맺는 자들이 많으므로 선군께서는 늘 현유(縣儒)들을 효유(曉諭)하여 말씀하시기를 ‘무릇 선비는 처자(處子)와 같아서 한 번 발을 잘못 디디면 즉시 몸을 다치게 되니 너희들은 그들과 어울리지 않도록 삼가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듬해인 무오(戊午. 1618)년에 흉도(凶徒)들이 봉소(封疏)의 폐위를 요청하는 통문(通文)을 현유들에게 보내어 현교(縣校)에서 약회(約會)하자고 하니, 이에 선군께서는 모든 유생들에게 현교에서 모이지 말도록 분부하셨습니다. 그러자 흉도들은 그 만남이 거절됨에 분노하여 하루는 현(縣)의 객관(客館)에서 제회(齊會)하여 앞으로 선군에게 청하고자 하므로 선군께서는 이에 문직이를 신칙(申飭)하고 불러서 급령(急令)으로 공궤(供饋)할 것과 또한 상소할 종이를 찾아줄 것을 요구한다고 현리가 아뢰자, 선군께서는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관사(官舍)는 시골에서 봉소(封疏)하는 곳이 아니고, 국법에는 소유(疏儒)에게 음식을 먹이라고 되어 있지 아니하므로 요구하는 모든 것을 갖추어 줄 수 없으니 감히 다시 그 여러 유생(儒生)들의 말을 고하는 자는 마땅히 중죄(重罪)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현리들은 모두 피하여 숨어 불응하고, 현유(縣儒)들 역시 불참하자 제일인자인 흉도가 마침내 다른 현으로 가서 봉소(封疏)를 하고, 그 자세한 참소(讒訴)와 그 이유를 들어 죄 줄 것을 청하니, 사간(司諫) 윤인(尹訒) 등이 이를 문제시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함평 현감 박모는 본래 사론(邪論)을 가진 사람으로 본직을 수여 받은 뒤에는 더욱 방자하여져 그 독(毒)이 소유(疏儒)들로 하여금 발붙이지 못하게 하고 연이어 현유(縣儒)들이 봉소(封疏)에 참여할 수 없게 하였사오니 사판(仕板)에서 삭제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청하니 광해(光海)가 즉시 이를 윤허(允許)하였습니다. 윤인 등이 장차 가죄(加罪)를 의론하려 할 때 마침 허균(許筠)의 역옥(逆獄)사건이 발생하고 소유(疏儒)들이 그 모사(謀事)에 많이 참여하여 복주(伏誅)되었음이 드러나자 그 논의는 드디어 그쳐졌습니다. 선군께서 현정(縣政)을 펴심에 있어서는 백성 모두가 성복(誠服)하였으므로 비석을 세워 송덕(頌德)하여 이르기를 “이년덕정 만고청풍(二年德政 萬古淸風)”이라 하였습니다. 관리들은 난망(難罔)하고 시골 백성들은 무사하다고들 말하니 이 역시 그 다스림을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윽고 관직을 마치시자 즉시 여강(驪江) 지역의 전사(田舍)로 돌아오셨습니다. 경신(庚申. 1620)년에 성균관(成均館)의 전적 겸 선전관(典籍兼宣傳官)에 임명되시고, 그해 가을에 대부인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사직하셨습니다. 계해(癸亥. 1623)년에 흥양(興陽) 현감에 임명되셨으나 얼마 되지 아니하여 변고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귀향하시려 하자 현 백성들이 나서서 비국(備局)에 더 유임하시게 할 것을 청원하였으나 불허되었습니다. 갑자(甲子. 1624)년에 역적 이괄(李适)의 변란(變亂)이 일어나자 전라감사 이명(李溟)이 조정에 청하여 선군을 종사관(從事官)에 기용하고 선군에게 주수(主帥)하게 하여 선군이 그 병력을 이끌고 여산(礪山)에 이르시니 전라도 병마절도사사(兵馬節度使) 이경직(李景稷)이 선군을 본디 잘 알기 때문에 선군이 큰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계문(啓聞)하여 일이 시급하므로 선군을 대행(帶行)하기를 청하여 병사(兵使)는 전대(前隊)를 거느려 입위(入衛)하고, 선군께서는 후군(後軍) 삼천명을 거느리고 따를 때 대가(大駕)는 이미 떠나 한강을 건너려 하고 있었는데, 그때 밤이 깊어 하늘이 깜깜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 모두의 소재를 알 수 없으므로 선군께서는 엄히 임무를 수행하도록 각 부서에 통솔령을 내려 섶을 많이 쌓아 올려서 불사르니 행로(行路)가 밝아져 나룻배에 이르렀을 때 사공들은 이미 도산(逃散)하였었습니다. 선군께서는 장교(將校)들로 하여금 도선(渡船)을 찾아 얻어 백료(百僚)들이 호종(扈從)하여 건너게 하셨습니다. 대가가 천안(天安)에 이르자 임금님께서는 선군을 호조정랑 적평 겸 춘추관기주관(戶曹正郎賊平兼春秋館記注官. 정5품)에 임명하셨습니다. 그해 여름에는 독운경차관(督運敬差官)에 임명되어 영남(嶺南)에 내려가 살펴보시니 혼조(昏朝)하던 정사(政事)가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어서 선군께서 조정에 청하여 이를 바로잡으셨습니다. 을축(乙丑. 1625)년에 평안도사(平安都事)에 임명되시어 가 보니 관찰사가 장부와 문서가 적체(積滯)되어 있어 결정 처리할 수 없어서 이를 선군에게 부탁하여 선군께서 즉시 이들을 모두 결정 처리하시니 관찰사가 극히 칭찬하였습니다. 병인(丙寅. 1626. 인조 4년)년에 임기가 만료되어 벼슬을 내어놓으시고 여강으로 돌아와 8월 16일 병으로 전사(田舍)에서 돌아가셨는데, 마침 그때 풍기(豐基) 군수에 임명되셨으나 미쳐 부임하지 못하셨습니다. 그해 10월 22일에 고을의 북등신(北登神) 가림리(嘉林里)의 북방을 향하는 언덕에 병좌(丙坐)로 장사를 지내니 향년(享年) 53세이셨습니다. 선군께서는 효우(孝友)이셔서 임진왜란으로 골육(骨肉)이 분리됨에 따라 선군께서는 홀로 대부인을 모셔 친히 말고삐를 잡고 다니시며 난을 면하시게 하시어 사람들은 그 정성스런 효를 느꼈다고 일컬었습니다. 계사(癸巳. 1593)년에 병선(兵燹)이 겨우 그쳤으나 나라에는 또한 대기근(大饑饉)이 왔는데, 선군께서는 맛있는 음식과 모직물을 주선하여 대부인을 모셨습니다. 부엌에는 양식(糧食)이 없거나 부족하였는데, 혹시 손님에게 주식(酒食)을 대접할 때에는 자미(滋味)는 언제나 노모 생각에 목이 메어 맛을 보지 못하셨으므로 이에 감동되어 선군을 자조(慈鳥)인 사람이라고들 하였습니다. 선군께서 함평 현감으로 계실 때 대부인을 잘 갖추어 영화롭게 잘 모시므로 식사를 올릴 때마다 대부인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들을 두어 재상급의 반열에 있음에도 전성지양(專城之養)을 보지 못하다가 이제야 너에게서 보는구나’ 하셨습니다. 대부인께서 나이가 이기(頥期) 선군의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시니 선군께서는 애훼(哀毁)가 유제(踰制)하심이 가득 차서 몸이 여의고 병이 나서 그 일로 일어나지 못하심이 얼마이셨습니까? 형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정중하면서도 공손하여 많은 사람들이 매우 어려운 바를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서제(庶弟)가 한 사람 있었는데, 선군께서는 두 분 형님께서 구몰(俱沒)하시어 너와 나만 남아 있을 뿐이므로 더불어 한 집에서 함께 살자고 하시고는 돌아가실 때까지 애혈(愛恤)하심이 약해지지 아니하셨습니다. 외제(外弟)의 아들이 가난하여 의식(衣食)이 어려우므로 데려다가 장성할 때까지 무교(撫敎)하셨습니다. 선군께서는 소성(素性)이 근신(勤愼)하시어 소관(小官) 시절에도 게으르지 아니하시고 작은 일에도 소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관직에서 물러나시어서는 전원(田園)에 사시면서 산수(山水) 간에서 우유(優遊)하셨습니다.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자리를 벌이기에 이르고, 때로는 관악기와 현악기로 즐기시어 같이 하는 사람과의 사귐이 훈연(薰然)하여 가히 친해졌습니다. 그 뜻이 지나치게 나쁘면 역시 이를 옳다고 구차하게 따르지 아니하시어 젊을 때 박홍도(朴弘道)와 더불어 친구로 지내셨는데, 홍도가 간흉(奸凶)과 사귀자 청요(淸要)에 승진하신 선군께서는 그 집안과는 만남을 끊고 일체 만나지 아니하셨습니다. 홍도가 그의 생일에 잔치를 베풀고 굳이 초청하였으나 끝내 가지 않으시니 그 신중한 교유(交遊)하심이 세리(勢利)에 따르지 않으시고 그 조수(操守)하심이 이와 같으셨습니다. 초취(初娶) 용인(龍仁) 이씨(李氏)는 가평(加平) 군수 종운(從運)의 따님으로 깊고 두터운 부도(婦道)를 갖추었으나 불행히도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따님 한 분을 낳으시어 사인(士人) 신후원(辛俊元)과 결혼시키시니 삼남이녀(三男二女)를 두어 아들은 익경(益慶)이고 딸은 이신하(李紳夏)와 결혼했으며 나머지는 어립니다. 재취(再娶) 안동(安東) 권씨(權氏)는 여산(礪山) 군수 주(澍)의 따님으로 연산조(燕山朝: 1476∼1506) 때 직신(直臣) 교리(校理) 달수(達水)의 현손(玄孫)으로 나이 19세에 선군에게 시집오시어 시어머님을 모심에서는 유순하시고, 종척(宗戚)은 화목하게 대접하시며, 가중(家衆)은 화목(和睦)하게 거느리시고, 전실(前室) 따님은 자기가 낳으신바와 같이 혜무(惠撫)하셨습니다. 6남 4녀를 낳으시어 아들 4인과 따님 3인은 일찍 여의셨습니다. 아들 만영(萬榮)은 정랑(正郎. 정5품) 조직(趙稷)의 따님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아 따님은 남양(南陽) 부사(府使) 윤계(尹棨)과 결혼하였습니다. 아들 천영(千榮)은 목사(牧使) 황수(黃瀡)의 따님과 결혼하였습니다. 불초(不肖) 등은 젊었을 적에 가훈을 멀리하여 그 선덕(先德)을 자세히 알지 못하여 오로지 보고 듣고, 친척에게서 전해 들은 바와 또한 그 당시의 약서(略敍)에서 기재한 바가 뚜렷하여, 이에 이르러서는 선군의 자품(姿稟)과 기식(器識)이 대자(大者)이시기 때문에 감히 선군에 대하여 망령되게 칭술(稱述)할 수 없습니다. 어두움과 슬픔과 같이 죽은 사람에게는 가엾어하고 산 사람에게는 그 아직 다하지 못한 뜻을 한마디의 말로 은혜를 주시어 뚜렷한 모든 무덤길을 얻게 하시어 오래도록 흙을 바르지 않게 하신즉 한 집안 유명(幽明)의 느낌이 어찌 다한 것이라 하겠습니까?

 

못나고 어리석은 상중(喪中)의 아들 천영(千榮)이

눈물을 흘리고 슬프게 울면서 삼가 적습니다. 

 

동호공 13세손 법학박사 이사관 박경현 역